워싱턴에서 평양까지


나는 구류장에 돌아온 후에도 어머니와 친척들이 들여보내는 음식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구류장에 있는 죄인에게 음식을 넣어주려면 계호원들에게 담배 한 보루씩 쥐어줘야 했는데 어머니 형편에서는 그런 고급 담배를 장만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계호원들은 담배나 술을 바치는 사람들의 음식만 전달해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먹어치우거나 떡봉이에게 줬다. 그러다 보니 권세 있는 사람들은 구류장에서도 집에서 해오는 밥을 먹었지만 나 같은 평백성들은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치사하게 음식으로 농간질하는 감옥은 이 세상 천지에 조선(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말로만 떠들 뿐 구류장 간부들이 벌이는 짐승 같은 수작은 정말 치 떨리는 것들이다.

철민이라는 21살짜리 계호원은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죄인들에게 입을 벌리게 해서 거기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분노한 죄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예심원에게 항의하여 침 뱉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몽둥이질이 더 늘었다.

내가 구류장에 있을 때 계호 책임자는 3호 감방에 있던 32살의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을 발설하면 평생 교화소에서 썩게 하겠다고 협박하여 한 여성의 인격을 악질적으로 파괴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붙잡혀 온 이 여성은 훗날 이 사건이 남편에게 알려져 이혼을 당하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간부들의 악행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호원 성혁이는 감방에서 악취가 난다며 세면장의 얼음물을 퍼다가 감방 안에 쏟아 붓기도 했다. 그래서 난방도 안 되는 한겨울에 하루 종일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또한 죄인 한 명이 잘못을 하면 감방 전체 죄인들에게 벌을 주는 것도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다.

계호원들은 툭하면 죄인들을 철창에 매달리게 했는데, 철창에서 떨어지는 죄인들에게는 몽둥이질을 가했다. 12명이 사람 위에 사람이 매달리는 식으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리는 그 인간들의 누런 이를 볼 때면 승냥이가 떠올랐다.

구류장 변기에서는 항상 악취가 났다. 변기 아래에 있는 수로는 계호원들이 사용하는 세면장의 물탱크에서 물을 틀어야만 물이 흐를 수 있었는데, 계호원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하루에 한 번밖에 물을 틀지 않았고 죄인들이 대변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계호원들에게 보고하지 않고 몰래 대변을 보다가 매를 맞는 사람, 변비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구류장 감방 안에는 변기 위로 조그만 공기창이 있었는데, 가끔 사람들이 공기창에 매달려 한 사람이 세 모금 빨면 밑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세 모금 빠는 식으로 12명이 번갈아 가며 몰래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계호원들이 난로 옆에서 담배를 피다가 버린 꽁초를 주워서 피웠다. 그 방법 또한 절묘했다. 나는 담요에 있는 실을 뽑아 아주 얇게 꼬아서 길이가 5m 정도 되는 끈을 만들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버선을 벗어서 한쪽 끝을 끈과 연결해 좁은 배식구 구멍으로 팔을 뻗어 난로 옆으로 던지면 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계호원이 감방 철문 안으로 들어오는지 안 오는지를 감시했다.

그렇게 버선을 던져서 끈을 잡아당기면 담배꽁초까지 끌려왔다. 이 방법을 옆 감방 사람들이 보고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감방마다 양말, 버선 등이 동원되어 경쟁적으로 난로 옆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획득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결국 6호 감방 사람들이 담배꽁초 낚시질을 하다가 계호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밤 6호 감방 사람들은 바닥에 땀이 흥건하도록 벌을 받고 녹초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조선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참상을 세상에 고발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계호원들은 가족들이 보내준 음식들을 난로 옆에 모아 두었다가 발로 툭툭 차서 철창 배식구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배식시간에 그 음식들을 국통에 모두 쏟아 넣고 국자로 휘휘 저어서 돼지 사료처럼 만들어서 죄인들에게 주었다. 아마 자기들 집에서 개를 키운다면 개한테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호원들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미는 사람의 얼굴에 뜨거운 국을 쏟아 부어 화상을 입히기도 했다.

죄인들을 때리는 참나무 몽둥이에 못을 박아 사람을 반주검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들의 만행은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떠한 징벌을 가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지난 일이지만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라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니 형기를 감하여 줄 것을 건의합니다.”라는 단 한 마디만 남겼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구류장의 간부들은 내가 최소 교화 10년은 받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판사가 7년을 선고하자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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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장에 들어간 지 8일째 되던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오전 11시경 계호 책임자가 감방에 들어왔다.

“준하! 너의 어머니가 이 추운데 너에게 밥 먹이겠다고 정문 앞에서 보안서장 자동차를 가로막아 난리가 났다! 너희 어머니 같은 사람 흔치 않아! 어머니 잘 만난 줄 알고 생활 잘해!”

계호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네 엄마 배가 불룩해서 뭔가 했더니 밥이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있더라!”

나는 계호원을 따라 면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파랗게 얼어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준하야, 배고프지? 아픈 데는 없니? 춥지? 옷 가져 왔으니 우선 옷부터 입어라!”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오.”

어머니가 가져온 옷을 입고 나니 추위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면회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어머니, 빨리 나가오. 조금 있으면 정치부장(정치사상사업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직책)이 온다니까 그 전에 빨리 나가시오!”

담당 계호원의 성화에 나와 어머니는 몇 마디 말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보안서장에게 부탁하여 밥을 넣어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받아먹지 못했다. 계호원들이 중간에 농간질을 하여 계호원들의 잡일을 도맡았던 죄인 떡봉이에게 그 밥을 모두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면회한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어머니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꾀를 냈다. 나는 형을 선고 받고 교화소에 가기 전에 어머니와 단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맹장이 터진 것처럼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오후 4시부터 오른쪽 아랫배를 쥐고 뒹굴었다.

그때가 리종수 계호원의 근무시간이었는데, 그는 내가 아파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며 아예 대기실에 앉아 철문까지 닫아버리고 상부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배를 쥐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의 다른 죄수들도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윽, 어후~ 아!”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뒹굴어도 리종수 계호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의 근무가 끝나고 성혁이라는 22살짜리 어린 계호원이 근무에 들어왔다.

“이거 어느 새끼가 고아대? 주댕이를 콱 문질러 버리고 말까보다. 어느 새끼야?”

계호원 성혁이는 악을 쓰며 뒹굴고 있는 나를 보자 대뜸 난로 옆에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더니 “야, 창호! 그 새끼 이쪽으로 끌고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끌어 철창 밑 배식구 앞에다 눕혀 놓자 그는 철창 사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 이 아픔을 참아야만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몽둥이질을 하건 말건 배를 움켜쥐고 계속 뒹굴었다.

계호원 성혁이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인자 새끼, 콱 썩어져라!”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저녁 10시경 계호원 영호가 근무를 교대하면서 내 비명소리를 듣고 전화로 계호 책임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계호 책임자는 감방에 도착하자 조용히 창호 형을 불러서 내가 꾀병인지 아닌지 묻더니 창호 형과 다른 죄인 한 명에게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내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고, 창호 형의 등에 업혀 나는 군(郡)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중학생 시절 친구 영춘이가 학교 수업 중에 맹장이 터져서 그를 업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영춘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질문과 진찰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의 기억 때문에 의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내 배를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에게 통증이 시작된 시간을 묻더니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피검사를 못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덜컥 겁이 나 있었다. 계호원의 몽둥이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꾹 참고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후회가 몰려왔다.

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계호원과 창호 형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의사 단둘이 수술실에 남게 됐다.

“너 꾀병이지? 솔직히 너 아픈 기색이 안 보인다.”
“예? 어째 병원에 오니까 아프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떠보기 위한 의사의 질문에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아프지 않으니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의사는 오히려 긴장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맹장이 터져 버려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의사는 곧장 긴급수술을 결정했다. 오히려 맹장이 터진 환자를 이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을 책망했다.

나에게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했던 계호원 성혁이는 “준하야, 너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 수술 잘 받고 와라!”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홀딱 벗고 수술실로 들어가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술대에 눕자마자 의사가 내 두 팔을 수술대에 묶더니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다 보니 그 고통이 엄청났다. 칼을 대는 배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속이 메스껍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뱃속을 살피던 의사는 내 얼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들더니 “너 정말 배가 아프긴 아팠니?”라고 물어왔다.

“선생님, 사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로 아프다고 했습니다. 달아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 그냥 어머니와 며칠간 병원에 있다가 교화소에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의사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계호원을 속이고 내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승인해줬다. 가른 배를 꿰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리가 뒤틀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봉합이 끝나고 나서 나는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고통을 참느라 팔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팔이 굳어서 구부려지지 않았고 몸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의사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서 옷을 챙겨 입고 204호 병실로 움직였다. 수술실 바닥에 흘려진 피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핑핑 돌고 연신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 2층 병실까지 갔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아침 7시가 돼서야 멎었다.

나는 의사의 배려로 일주일 뒤에 뽑아야 할 실을 10일 뒤에 뽑았다. 실을 뽑고 구류장으로 돌아가던 날, 보안서 정문 앞으로 배웅 나온 친구와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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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간의 구류장 생활은 놀라움과 함께 모멸감으로 얼룩졌다. 구류장에 도착해서 처음 3호 감방 안에 들어갔을 때 총 8명의 죄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어디서 요런 삐에로가 들어왔나?”

반갑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인지 감방장이 나에게 던진 첫 말이다.

“야, 감방장!”
“예.”
“그 새끼, 살인자 새끼야. 교양 좀 해라.”
“알았습니다.”

말이 끝나는가 싶더니 감방장이 내 배를 걷어찼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발길질이 생각보다 약했다. 맞은 둥, 마는 둥 그냥 서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감방장은 조금 당황해 하더니 이번에는 주먹으로 내 얼굴을 치려고 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양 옆으로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도 엎어뜨렸다.

감방장이 얼굴을 싸맨 채 비명을 지르고, 두 사람이 땅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뒹굴자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만 꽥꽥 지를 뿐 덤비지는 못했다.

철창 밖에서 상황을 이해한 말단 계호원이 난로 옆에 있던 쇠갈퀴를 들고 감방 문을 열며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철창 문 밖으로 나가자 간수들 둘이 쇠갈퀴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나를 내리쳤다. 나는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두 팔이 늘어질 때까지 죽도록 맞아야 했다.

계호원들은 반죽음이 된 나를 4호 감방으로 끌고 갔다. 감방 안에 있던 죄인들이 시체처럼 늘어진 나를 차디찬 돌바닥에 눕혀 놓았다.

온몸이 쿡쿡 쑤시고 뒤통수가 땅기면서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왔다. 이가 ‘탁탁’ 부딪칠 만큼 온몸이 떨려왔다. 제일 뒤편에 앉아 있던 창호라는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기가 깔고 앉아 있던 담요를 내게 덮어주었다.

잠시 후 구류장 복도로부터 불고기 냄새가 풍기면서 죄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감방 앞쪽 난로 옆에서 근무를 서는 계호원까지 합쳐 6명의 계호원들이 자기네 침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모든 감방 죄인들은 다리를 펴거나 벽에 기대어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됐소?”

나에게 담요를 덮어줬던 창호라는 사람이 물었다.

“올해 19살입니다.”

창호 형은 31살로 나와 같은 이 씨였다. 창호 형과 통성명을 끝내자 옆 감방에서 창호 형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창호야, 새로 온 그 새끼 집이 어디야? 니가 콱 죽여버려라!”
“강철아, 이제 그만해라. 네가 좀 참아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진짜 현실인가? 내가 정말 15평도 안 되는 이 좁은 감방에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영화로만 보던 철창들, 반미터도 안 되는 콘크리트 칸막이 변소, 기름때에 절은 나무 바닥, 3m는 더 되어 보이는 천장.

철창 앞에서 통방하던 창호 형이 내 옆으로 오더니 말을 건넸다.

“저쪽 아이들이 너 욕하는 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내라.”

하지만 나는 창호 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바닥과 벽에 씌여진 희미한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는 내일 나간다! 324일!’
‘나가서 보자! 개새끼들아!’
‘저주받을 이곳에 날벼락이나 떨어져라!’

자유를 구속당하고 여기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절규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써 있었다. 나무 바닥에 바늘로 긁어서 글자를 새겨 놓은 것도 보였다.

12시가 다 돼서야 “이제 몽땅 뻗어 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감방 안의 인원이 12명이었으니 당연히 방금 들어온 내 자리는 나무판자가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나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창호 형이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준하야! 취침시간에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모두가 기상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더니 창호 형은 자기가 깔고 있던 모포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모포를 둘둘 말고 눕긴 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한참을 떨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웬일인지 온몸이 점점 더워지더니 이내 간지럽기 시작했다. 일어나 모포를 걷어 부치고 웃옷을 벗어보니 시커먼 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넌 왜 안 자고 일어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소위 계급을 단 보안원이 뒷짐을 진 채 나를 추궁했다.

“너, 오늘 들어왔던가? 그냥 참고 얼른 자라!”

보안원이 사라지자 나는 손톱으로 이를 잡았다. 도대체 몇 마리가 내 몸에 붙어 있는지 숫자를 헤아리다 보니 100마리가 넘었다. 이잡이를 할 만큼 하고 나서 다시 모포를 둘러쓰고 자리에 누웠더니 이번에는 계호원이 들어와서 “기상!”을 외쳤다.

옆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나도 무릎을 꿇고 뒷짐을 진 채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1호 감방부터 점검이 시작됐다.

“선생님, 1호 감방 청소 및 정돈 끝났습니다. 앉을 준비 할 수 있습니까?”

감방마다 보고 방식은 똑같았다. 그렇게 1호 감방부터 10호 감방까지 보고가 끝나자 자리에 앉으라는 계호원의 지시가 떨어졌다. 구류장의 죄인들은 울방자(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양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는 90도 각도로 숙인 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8시까지 앉아 있으니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계호원이 밥이 담긴 그릇을 쌓아올린 작은 수레를 끌고 감방 앞을 지나가며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면 두 줄로 앉아 있던 죄인들은 그 자리에서 양쪽 벽을 등지고 마주 앉았다.

“선생님, 1호 감방 밥 먹을 준비 끝났습니다!”는 보고가 10호 감방까지 끝나고 나면 계호원이 밥을 퍼주기 시작했다. 창살 앞에 앉은 사람이 우리 방 인원이 12명이라고 보고하자 국그릇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배식구로 그릇들이 들어왔다.

1차로 먼저 밥을 주고 2차로 국을 퍼주는데, 이때 밥을 받던 사람이 재빠르게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밀어서 국을 받아야 한다. 계호원은 담배를 꼬나물고 뒷짐을 진 채 한 손으로 국을 퍼주는데 어떤 그릇은 국을 적게 담고 어떤 그릇은 국이 넘치도록 담아 국을 받는 사람이 손을 데는 경우가 많았다.

내 앞에 차려진 국그릇을 처음 봤을 때는 구역질이 날 뻔했다. 때가 잔뜩 낀 플라스틱 그릇에 새까만 시래기 건더기 한 줄기만 동동 떠 있었다. 내 옆 사람은 그 시래기 건더기조차 없었다.

“먹으라!”

계호원의 구령이 떨어지자 죄인들은 국에 밥을 말아서 훌훌 떠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그 밥과 국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구류장에서는 앉아 있는 그 자체가 고문이고 형벌이다. 규정대로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보면 목과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창살 앞에 서 있는 계호원에게 들통이 났는데, 그러면 계호원들은 움직인 사람을 철창 앞으로 불러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러고는 권총으로 손등을 내리찍었다.

구류장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들은 이 찰나에 눈치껏 목도 돌리고, 허리도 구부렸다 폈다.

나는 구류장에 들어간 첫 주 동안은 하루에 2~3번씩 철창 앞에 불려나가 권총으로 손등을 맞았다. 나에게 제일 악하게 굴었던 계호원들은 리종수, 철민, 성혁, 이 세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긴장을 하고 앉아 있어도 그들의 트집잡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감방 근무를 설 때마다 나는 권총으로 머리와 손등을 맞거나 머리를 땅에 박고 뒷짐을 진 채 1시간 동안 버텨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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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 입술은 파래지고”

어머니는 시금치죽을 먹으면서도 사탕장사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두 달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정말이지 부모 곁을 떠나 보아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뜻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참뜻을 5년간의 감옥살이를 통해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20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나는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면회할 때는 얼굴만 보고 손조차 잡아 볼 수 없었으므로 나는 어머니가 위안 삼을 만한 글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 연필과 종이를 펴놓고 편지 내용에 대해 궁리했다. 좀처럼 어머니에게 힘이 될 만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워서 궁리하던 머릿속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날의 일들이 삼삼히 떠올랐다.

1998년 11월 26일, 친구 광일이의 생일이라 놀다가 오후 1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는 “준하냐?” 하며 반기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누워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머니, 어디 아픕니까?”
“아니……”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러 번을 물어서야 어머니는 겨우 말을 떼었다.

“준하야. 너가 모르게 기철이 삼촌한테 돈 2,000원(당시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은 70~100원)을 꾸어 주었는데, 1년이 다 되도록 갚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그동안 여러 번 받으러 갔는데 매번 꼭 갚겠다고 하기에 양보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면서 엄마를 막 때리려고 하더라. 너무 사정을 하기에 돈을 빌려줬는데, 이제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좋니?”

어머니와 먼 친척뻘 되는 그 사람을 나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생을 술로 살았다. 술에 미쳐서 나중에는 아내와 자식들 몰래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술과 바꿔먹고는 집에 도적이 들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런 삼촌을 나는 평소부터 무시했고, 길에서 만나도 못 본 척했다.

‘자기 집을 망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우리까지 괴롭히려 들다니……’

게다가 어머니를 때리려고 했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나를 말리려다가 “돈을 꼭 받아 오겠다”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당시 조선 돈 2,00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곧 삼촌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촌 아내가 나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준하야,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저 인간이 글쎄, 네 엄마 돈까지 술과 바꿔먹었으니. 나도 이젠 더는 같이 못 살겠다.”
“아줌마가 나에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 다 저 사람이 문제지!”

나는 금방 술이 깬 듯 흰자위가 뻘겋게 충혈된 삼촌을 끌고 대문 밖까지 나왔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내일까지 돈을 갚아달라는 말에 삐딱한 태도로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알다시피 이 삼촌이 돈이 어디 있니?”
“그럼 돈 빌려 갈 때는 갚을 생각도 없이 그냥 가져갔소?”
“임마, 엄마하구 내가 버무린 일인데 왜 네가 끼어들어? 쪼끄만 것이 버릇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담벼락에 머리를 찧고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 일인데 아들인 내가 왜 상관이 없소? 사람 알기를 더럽게 아는구만!”

아줌마가 뛰어와서 더 때리지 말아달라며 말리기에 분을 삭였다.

“무조건 내일까지 갚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소.”
“알았다. 며칠 내로 꼭 갚아주마.”
“언제요?”
“열흘 안에 갚아 줄게. 임마!”

정확히 10일 후에 갚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냥 떼먹자고 드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나 혼자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삼촌이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 갔단다.

보안원(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안원은 나에게 자기와 함께 보안서(경찰서, 한국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기관은 ‘분주소’라 함)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항의도 무시한 채 보안원은 나를 보안서로 데리고 가서는 임시로 대기실이라는 방에 가두어 놓았다.

“삼촌이 살아나면 적당한 처분만 받고, 죽으면 너도 죽어야지 어쩌겠냐?”

대기실 철문을 잠그면서 보안원이 말했다. 나는 삼촌이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에 10일 후에 돈을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던 사람이 무슨 일로 죽는단 말인가? 또 지난번처럼 술을 너무 마셔서 위경련이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갇혀 있노라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문이 열리면서 보안서 부서장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집에 가기 전에 비판서에 손지장만 누르고 가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그렇지. 삼촌이 죽을 일이 있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부서장을 따라 어느 기다란 집에 들어갔다. 보안서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던 나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서장의 사무실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아무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에 들어갔던 부서장이 인차 나오면서 나더러 들어가 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장 찍는 일을 시켰는가 보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여 “옷은 왜요?”라고 했더니 앞에 섰던 보안원이 발길질을 했다.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어디라고 대들면서 지랄이야?”
“비판서에다 지장만 찍고 집으로 가라기에 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때립니까?”
“조용히 해! 여기는 죄인들을 가두는 구류장(유치장)이야. 한번만 더 소리치면 가만 안 둬!”

그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그 계호원(간수)은 내 옷에서 일체의 금속물들을 모조리 뜯어 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이 떨리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다시 옷을 입자 그는 나를 2호 감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야 감방장, 그 새끼 사람 죽인 살인자야. 교양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가 살인자라니 말도 안 돼. 그럼 삼촌이 정말 죽었단 말인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질 않았다. 예심(심문, 사전적 의미는 범죄사실 등을 밝혀내는 소송행위)을 받으면서 나는 삼촌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땅에 넘어지면서 바닥에 박혀 있던 뾰족한 돌에 머리를 찧어 병원에서 4시간 만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회와 반성의 모대김과 함께 5개월간의 예심과정을 거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145조 2항 '과실적 중상의 살인' 죄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삼촌의 사망 감정결과는 ‘차수막 뇌출혈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입술이 파랗게 되고 손등은 꽁꽁 언 채 나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국과 밥을 품 안에 넣어 보온하면서 보안서 철문 앞에서 장시간을 기다렸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면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편지로나마 위안의 글을 드려야겠는데, 쓰려고 펜을 드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새벽녘에 일어나서 쓰리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피곤한 터라 기상총소리와 함께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여 끝내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말았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http://nkd.or.kr/nkd/read.html?s=3001&no=809&page=1,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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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북한의 공개처형 영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상은 북한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
나라와 민족의 반역자"라며 3발의 실탄을 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김정일에게 충성한 놈들도 싸그리 주민들에게 정리돼야한다"

 "이런 집단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더 이해 안간다. 전원 강제 북송시켜야 된다"

라는 등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에 배포된 영상은 일본의 한 인터넷 방송에서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블로드와이드닷컴
http://www.blogwide.com/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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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성장해왔다.

꿈에도 그리는 통일이란 노래가 이제 가물가물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간다.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현실의 벽에 막혀 허물어져가고 있다. 

 

지금 지구상에서 한 민족 한 국가가 분단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독일이나 예멘이나 베트남도 모두 통일 됐다.

동서독은 소련의 붕괴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예멘과 베트남은 무력으로 이루어졌다.

 
과연 한반도의 통일은 우리의 이상(理想)대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까.

모 통일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우리국민의 절반은 ‘평화만 유지된다면 통일되지 않아도 좋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자라나는 학생들의 통일의식을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부정적 통일관을 갖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 때문에 통일이 되면 남한도 북한 주민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결국 통일 비용으로 인해 남한도 더 궁핍하게 되니까 현재와 같이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지금 학생들에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먼 나라의 노래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는 민족의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계속되는 남북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4대 강국(미,중,러,일,)의 입김이 작용하는 탓으로 한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통일관이 은연중 자리 잡게 되었다.

 

지난 21일 뉴욕의 미국외교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 독일과 예멘은 결국 통일이 됐는데 한반도에서는 그런 화합이 왜 못 이루어지느냐” 는 한 참석자의 질문을 받고 처음으로 실용적 통일관을 피력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과의 통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화평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북한의 경제적 상황이 더 향상되도록 하는 것” 이라며 “북한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져야 통일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주로 당위론적이나 가치론적인 통일관을 피력한 것과 달리 이대통령은  경제에 무게를 둔 실용적 통일관을 처음으로 피력한 것이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공약인 ‘비핵, 개방, 3000’구상이 바로 이대통령이 뉴욕에서 언급한  경제적 통일관을 뒷받침해준 것이라 봐야 한다.

 

만일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한다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고 그때쯤 가서야 통일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정권들의 통일정책은 대통령이 바꿔질 때마다 변질되었다.

 
국민들이 알고 있는 남한의 통일방안은 1989년 발표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 주축을 이루고 ‘남북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점진적 통일을 기해야 한다는 방안이다.

이에 반해서 북한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을 갖고 있다.

고려 연방제 통일이 되려면 선결조건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 주한미군철수. 남한 내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허용을 주장하고 있어서 사실상 북한의 통일방안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이라는 위장된 적화 통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남북한이 아무리 화합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기 위하여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이 통일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인한 통일문제가 어려운 난제에 얽혀있다고 하여도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어느 날 통일이라는 기회의 여신이 찾아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국제적 환경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만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갑자기 죽게 된다면 북한은 어떻게 될까하는 체제의 변화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속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과정으로 보고 본래의 자연스러운  통일된 상태의 조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볼때 통일의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출처: 청석님의 블로그 로마인이야기
http://blog.daum.net/phsminister/11296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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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실행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모란봉구역에 있는 을밀대를 오르는 길에 데이트하는 남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를 보자 남녀가 살짝 고개를 돌립니다. 남자의 손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의 손가방이 들려있습니다.

성을 오르면서 힐긋힐긋 뒤를 쳐다보았더니
여자는 자꾸만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남자는 계속 붙잡습니다. 그리고는 무언가 열심히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아마도 사랑싸움을 하는 중인가 봅니다.

그런데 을밀대를
오르면서 보니 산속 곳곳에 
데이트 하는 남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북한의 연인들도 인적이 드문 산속을 데이트 장소로 애용하는가 봅니다. ㅎㅎ 

 


출처: 시 그림자님의 블로그 정략인닷컴
http://jeongrakin.tistory.com/entry/%EB%8D%B0%EC%9D%B4%ED%8A%B8-%ED%95%98%EB%8B%A4%EA%B0%80-%EB%93%A4%ED%82%A8-%EB%B6%81%ED%95%9C%EC%9D%98-%EC%97%B0%EC%9D%B8%EB%93%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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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31일, 서울 파이낸셜포럼 조찬 강연에서 내년 4월로 예정된 제 4차 G20 정상회의가 우리나라에서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렇게 되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우리나라로서는 4차 G20 정상회의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고 있다는 강력한 희망을 밝히고 있는 이라면서 관련국들의 반응은 비교적 호의적이라고 전했다.

4차 회의 장소는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리는 제 3차 G20 정상회의에서 결정되는데 재정부 관계자들의 종합해 보면 결국 다음달 각국 정상들이 결정할 일이기는 하지만 4차 내년 4월 우리나라에서 열릴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 보인다.

앞서 다음달 미국에서 열리는 3차 G20 정상회의에서는 금융위기 이후 국제 거시정책 공조와 관련해 단기출구전략이 논의될 예정이다.

전략은 지난해 하반기에 시작된 국제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제공조 차원에서 도입된 한시적 조치들을 원상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회의에서는 세계경제가 회복국면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라는 것을 뒤 출구전략 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에 출구전략은 바로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결정하기 보다는 출구전략을 시행할 시기와 국민들과의 소통 전략 등에 대한 원칙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행시기는 어느 시점부터 출구전략을 시행할지를 의미하고 절차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재정정책을 먼저 원상회복할지 아니면 금융정책부터 회복시킬지가 된다.


출처: http://discover.textcube.com/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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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땅에 희망 전파 자유북한방송 5주년
직원 10명 모두 탈북자 사연 소개하다 펑펑 울음
'피묻은 도끼' 협박 3차례 국경없는기자회 상(賞) 받아


"오늘 '탈북자 수기' 코너에서는 김춘란(가명)씨의 사연을 소개해드립니다. '그날 저녁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집에 실려온 동생은 밀빵 하나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새벽에 눈을 감았다….'"

20일 오전 10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 주택가 상가건물 5층에 자리잡은 132㎡(40평)짜리 '자유북한방송' 스튜디오에서 이 방송국 기자 김영일(가명·27)씨가 사연을 읽어 나갔다.

스튜디오 유리벽 바깥에서 방송을 점검하던 자유북한방송 김대성(가명·34) 국장이 "우리 방송국이 첫 방송을 내보낸 지 오늘로 꼭 5년"이라고 했다.

"방송의 '방' 자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고생 끝에 첫 방송하던 날을 생각하면 이만큼 온 게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엔 부천 집에서 신정동 회사까지 나는 듯이 왔어요."

자유북한방송은 아나운서 2명, 엔지니어 1명, 기자 7명 등 직원 10명이 모두 20~50대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이다. 북한에서 직장 방송국 아나운서를 했던 이경희(가명·여·42)씨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마이크를 어떻게 만지는지, 대본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던 문외한이었다.

북한에서 골방에 틀어박힌 채 남몰래 한국 라디오를 들은 것이 방송 경험 전부였다. 이들이 힘을 합쳐서 북한 동포들을 향해 바깥세상 소식을 쏜 지 5년이 된 것이다.




20일 오전 김대성 자유북한방송 국장(오른쪽)과 김춘애씨가 서울 신정동 자유북한방송 스튜디오에서 다음날 방송분을 녹음하고 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개국 초기엔 직원 3명이 월급 30만원으로 생계를 꾸리며 하루 30분씩 방송했다.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요즘은 미국 시민단체 민주주의진흥재단(NED)의 후원을 받아 직원 월급도 100만원으로 오르고, 라디오 방송극을 내보낼 만큼 프로그램도 다양해졌다. 방송시간도 늘었다.

밤 8~9시반, 밤 11시~새벽 1시, 새벽 4~5시반까지 주파수를 바꿔가며 하루 세 차례씩 5시간 방송한다. 전파 송출은 영국 민간 기업에 위탁해 몽골·베트남·캄보디아 기지국에서 한다. 우리 정부가 남북한 간의 '비방 방송 금지' 합의에 따라 직접 송출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돼지 피를 묻힌 손도끼가 세 차례 방송국에 소포로 배달되기도 했다. 수취인 이름은 '황장엽'. 경찰 수사결과 황장엽(86)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출연에 불만을 품은 국내 좌파단체 회원이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김대성 국장은 "처음엔 등골이 서늘했지만 자꾸 받으니까 '뭘 이렇게 자꾸 보내나' 싶더라"며 웃었다.

자유북한방송의 주된 청취자는 북한 주민들이다. 청취층은 꽤 넓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민주주의진흥재단이 탈북자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8%가 "북한에서 이 방송을 들었다"고 답했다.

방송하는 사람도 탈북자, 사연을 보내는 사람도 탈북자이다 보니 방송 도중 스튜디오가 눈물바다가 되는 '방송사고'도 수시로 발생한다.

아나운서 김춘애(가명·여·55)씨는 인민군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굶주림에 못 이겨 탈북했다. 김씨는 지난 1월 한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사연을 읽다가 방송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목을 놓아 울었다. 사연에 등장한 '평안남도 증산군 노동교양소'가 김씨의 남편이 아사(餓死)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유리벽 너머에 앉아 있던 남자 엔지니어도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늘 슬픈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방송국에서는 탈북자 수기를 드라마로 각색해 방송한다. 한 편당 등장인물은 15명 정도다. 이 방송국 직원은 대표까지 합쳐도 10명이라서 엔지니어·아나운서·기자 할 것 없이 전원이 나서서 1인2역을 소화한다.

문 여닫는 소리, 노크 소리 같은 효과음은 현장에서 해결한다. 대사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문 옆에 서 있다가 얼른 효과음을 만들고 마이크 앞으로 뛰어오는 식이다. 갑자기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남자 직원이 여자 역을 맡은 적도 있다.

김대성 국장은 "그때 너무 웃겨서 다들 배를 잡고 웃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서 녹음했다"며 "굶주림, 목숨을 건 탈출, 가족과의 생이별 등을 다룬 내용인데 그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겼다"고 했다.

이들의 긍지는 '휴전선 너머에서 방송을 듣는 동포들이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김춘애씨는 "나도 북한에 있을 때 밤 11시만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유북한방송을 들었다"며 "그때 한국 소식을 들으면서 '아, 이런 세계가 다 있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일한 '방송 유(有)경험자'인 아나운서 이경희(가명·여·42)씨는 2006년 9월 입국했다. 이씨는 "이곳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방송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며 "북한에 남아있는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고 했다.

자유북한방송은 작년 12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다국적 시민단체 '국경없는기자회(RSF)'가 주는 '올해의 매체상'을 받았다. 이들은 다음달 8일 목동에 지금보다 두 배 넓은 사무실을 마련해 이사를 간다. 김대성 국장은 "서울에서 직접 북한으로 전파를 쏘는 날이 오면 좋겠다"며 "통일이 오는 그날까지 열심히 방송을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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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VIDEO/양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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