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평양까지


내 나이 21살 되던 해의 어느 날, 하루 노동을 끝내고 감방으로 돌아와보니 신입반에서 6명의 죄인들이 우리 벌목반에 전방되어 왔다. 그중에는 구류장에서부터 허약 1도에 걸려 교화소에 입소한 류영남이라는 20살짜리 청년도 있었다.

20살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는지 아직 뼈도 굳지 않은 것 같은 왜소한 체격에 성격 또한 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영남이는 3살 아래 누이동생 영희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중국 땅을 건너다니며 쌀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영남이는 중국 농촌 마을에 건너가서 쌀을 얻어오다 여러 번 국경경비대 군인들에게 붙잡혀 보안서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나이가 어리다고 노동단련대(북한의 수형시설의 하나로 경범죄나 경제사범, 단순 형사 사범들이 수감된다. 해당 지역 인민보안성(경찰청)에서 관리하며, 강제노동을 통해 수인들의 수형, 당과 형법에 대한 충실성을 키우는 것이다) 처벌로 끝났지만, 비법월경 횟수가 많아지자 ‘교화 3년형’을 받고 전거리 교화소로 끌려온 것이다.

취침 구령이 울려 퍼지자 감방 제일 뒤편에 있는 내 자리에 누워 반장과 영남이가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입소했던 첫날이 떠올라 영남이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신입자들과 며칠 동안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들의 인물됨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벌목반은 반장부터 인정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귀동냥했던 터라 신입자들은 반장과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했으며, 사이좋게 생활할 것을 약속했다.

다음날 식사시간이 되자 나는 말없이 반장 옆에 앉았다. 영남이는 반장과 함께 밥을 먹는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다른 신입자들도 나이 어린 내가 반장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우리 작업반의 1조 조장이었다. 감방 안에서 반장, 조장과 일반 죄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환갑을 넘은 사람도 반장과 티 앞에서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반장과 조장은 무조건 반말로 이야기했다.

사실 나이 어린 내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면서 드세게 놀지 않으면 반장과 함께 교화반을 이끌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입자들이 나를 어려워하도록 처신했다. 반장은 반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빛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격상 특징과 인간됨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나 또한 시간을 두고 사람을 관찰하는 습성이 생겼다. 본성이 착한지, 말로 사람을 갈구리(해코지)하는 습관이 있는지, 의리가 있는지, 똑똑한지, 먹을 것 앞에서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인지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처럼 마음을 터놓고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교화소에서 사람의 눈빛만 보고 내면을 파악하지 못하면 교화반을 이끌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영남이와 같은 신입자들이 지옥 같은 교화소 생활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는 데 첫 번째는 노동에 단련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화소는 일반 사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감방에 들어와서까지 꼬박꼬박 줄을 맞춰 학습하고, 욕을 먹으며, 매를 맞아야 하는 곳이다. 이런 생활을 이겨나가자면 웬만한 투지와 인내력으로는 부족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그들의 인내력을 키워줘야 했고, 죽기 직전에 처한 그들을 한 번씩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반장과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노동시간 외에는 신입자들과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뭘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식으로 냉정하게 굴었다. 또한 감방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건, 늦게 들어온 사람이건 조금이라도 눈치 없이 행동하거나, 몸을 사리면서 노동할 때는 가차 없이 짧고 굵은 욕설을 뱉어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려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두들겨 팼다. 하지만 나는 반원들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아무리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둘러도 일요일마다 말없이 강냉이가루 죽을 쑤어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기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영남이가 전방되어 우리 교화반에 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는 학습하고 있는 영남이의 생김새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푹 꺼져 들어간 눈, 귓바퀴가 눈에 띄게 움푹 팬 관자놀이, 길쭉한 귀, 가느다란 목에 볼록 솟은 목젖…….

“영남이, 허약 걸려 죽자고 그래?”

갑자기 놀란 영남이가 영문을 몰라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영남이, 그러다간 살아서 집에 못가. 먹을 궁상 그만해라!”

반장도 영남이를 보고 무게 있게 한마디 거들었다.

“영남이, 이리 오라!”

내 말에 영남이는 내 앞에 와 앉았다. 제 딴에는 재빠르게 행동한다고 했지만, 허약병에 걸린 몸은 엉기적거리며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남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내 눈빛에 긴장하고 있었다. 감방 사람들 전체가 숨을 죽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네 자리로 가라!”

영남이는 더욱 얼떨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영남이, 나에게 왔다가는 동안은 먹는 궁상 못했지?”
나는 그때서야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내가 두 달 만에 영남이에게 보여 준 첫 미소였다. 감방 내의 팽팽한 긴장감이 일거에 풀렸다.

“누구든 힘들면 가족을 생각하라. 우리는 하루 세끼 강냉이밥이라도 먹지만 밖에 있는 가족들은 풀죽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의 짧은 연설에 모두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반장도, 나도, 영남이도, 다른 죄수들도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에 빠졌다.

“반장, 사 선생이 돌아보고 있소!”

감상적인 시간도 잠시,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감방마다 제대로 학습을 하는지 살피는 잡부조장의 말에 모두가 또다시 장군님의 교시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우리 조의 노동 과제가 다 끝나자 나는 영남이에게 다가갔다. 울상을 해가지고 도끼질을 하는 영남이를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팔로 힘들게 도끼를 휘둘러보지만 오히려 도끼질에 온몸이 흔들려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끼질에 튀어 오르는 도끼밥이 눈꺼풀을 때려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면서 낑낑거렸다. 당시 영남이는 전방된 지 두 달이 넘도록 혼자서 나무 하나를 찍지 못해서 담당 관리의 채찍에 얻어맞는 일이 잦았다.

“영남이, 비켜라!”

나는 얼른 나무를 찍어 절단해서 영남이의 하산바에 메어주고 나무가 잘 끌리도록 밑면을 다듬어 주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영남이의 눈길에서 고마움이 묻어났다.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면 뭔가 줘도 미운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안 줘도 고운 사람이 있듯이 나에게 영남이는 친동생 같은 존재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영남이가 착하고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춥고 배고프면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생각하는데, 영남이는 자신이 어려워도 남에게 양보할 줄 알았으며 나에게서 밥덩이를 한 개 받아도 꼭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었다. 또한 우리 반 담당 보안원이 영남이를 살짝 불러 나와 반장에 대해 캐물을 때도 영남이는 매를 맞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반장과 힘을 합쳐 영남이의 허약을 퇴치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는 작업에 나가면서 영남이에게 휴역(작업에 나가지 않고 감방에서 대기하는 것)을 지시하고 펑펑이가루 5kg을 안겨 주었다.

감방마다 1~2명 정도는 반장의 권한으로 휴역을 지시할 수 있었다. 원래 휴역자들은 병방 1호실에서 위생원의 관찰하에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강냉이떡을 빚어 먹을 수 있는 비닐주머니와 물 한 동이를 떠다 놓고는 영남이를 그대로 감방에 놔두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1호 위생원과 잡부조장에게는 사 선생이 점검할 때 적당히 막아달라고 부탁하고, 영남이에게는 “아무 걱정 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보이지 않게 감시창 밑에 바짝 붙어서 자라!”고 말하고 작업에 나섰다. 저녁 때 감방에 돌아와 보니 내가 놓고 간 펑펑이가루는 별로 줄어있지 않았다. 못해도 2kg은 먹어치웠을 줄 알았는데 먹은 흔적이 별로 없었다.

“영남이, 왜 안 먹었나? 어디 아프니?”
“아닙니다. 여느 때는 이걸 혼자 먹으라면 다 먹을 것 같았는데 정작 옆에 사람도 없고 혼자 먹으려고 하니 금방 배가 불러서 얼마 못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남은 것은 교화반 사람들과 나누어 먹겠다고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영남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꼭 산다!”고 말해줬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다음날 다시 먹겠다고 할 상황인데 허약 1도가 된 몸을 가진 그는 자기 앞에 차려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영남이에게 정이 갔다.

네 달 만에 영남이 몸무게는 67kg까지 됐다. 키가 163cm인 영남이가 67kg이 됐으니 얼굴과 몸이 퉁퉁 부었는데, 나는 그 부은 살이 근육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나는 영남이에게 ‘뭉그덩’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어느 날 내가 “야, 영남아!” 하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자, “야, 뭉그덩!”이라고 다시 부르니 거침없이 “예!”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 바람에 반원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그날부터 영남이의 별명은 ‘뭉그덩’이 되었다.

하루는 영남이를 데리고 취사장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쉬는 명절날이나 일요일 같으면 취사장 조장 량명학이 의례히 내가 먹을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단지밥이 아니라 사람이 먹는 그릇에 따끈한 밥을 담고 된장까지 척 얹어서 인간다운 식사를 했다.

취사장에 들어간 영남이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취사장은 몇몇 반장, 조장들을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랍식으로 된 고압 밥가마, 그 밑에 큰 뚜껑 두 개가 마주 붙어 있는 국솥(전기가 없어 장작을 태우는 보일의 증기를 이용하는 솥), 밥을 뒤집는 판, 삽, 밥 찧는 단지, 물탱크, 분쇄기 등 영남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와 보지 못한 반장들보다 네가 높구나!”라는 말에 량명학이 웃음을 터뜨렸다. 량명학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영남이가 갑자기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조장, 감사하오.”
“으이그, 누가 죽었니?”
“예전 신입자 때 조장이 처음으로 내 나무를 찍어주며 ‘힘들지?’ 하고 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 처음에는 조장이 말이 별로 없어서 무섭고 독한 사람인 줄 알았소. 그리고 내가 허약에 걸렸을 때 ‘너는 꼭 산다!’고 말해줬을 때 정말 신심이 생겼소. 조장이 없었으면 나는 아마…….”
“됐다, 임마! 남자 새끼가 울긴.”

영남이 이후로 동생뻘 되는 신입 죄인들이 6명 정도 들어왔지만, 나는 영남이처럼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데리고 가는 곳마다 눈치 빠르게 처신해주며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는 영남이를 나는 항상 옆에 끼고 다녔다.

하지만 나와 영남이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허약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그가 내 곁을 떠나 불망산으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영남이가 떠난 날은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계속)

2009년 3월 2일 리준하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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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도 마찬가지지만 교화소에서 생각 없이 지내는 사람은 둔해지기 마련이고 항상 남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문득 지금 내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이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반장들의 대부분이 사회에서 돈이 많거나 직위가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입소 첫날부터 별 고생을 하지 않다가 쉽게 반장자리에 오르게 되어 나 같은 일반 죄인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반장 한 사람이 작업반 하나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옆에서 두세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반원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반장 아래 있는 우두머리를 흔히 ‘티(조장)’라고 부른다.

사실 반장은 담당 간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며, 이 티들의 활약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이가 48살인 우리 벌목반장은 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티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내가 스스로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벌목반은 바른 말을 하고 일을 잘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소를 해서, 나와 한두 달 차이로 교화소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티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다툼을 벌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것처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다툼질 하면서 싸우다보니 후에 들어온 신입자들 또한 서로 물어뜯고 하면서 화목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나 혼자서 얼마든지 쉽게 생활할 수 있었다. 노동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며, 나를 믿고 정을 주고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티가 되면 작업반을 잘 운영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욕도 하게 되고 미움도 받을 수 있었으며, 전에 사이가 좋던 사람들과도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티로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굶주림에서 시달리는 죄인들의 눈에는 항상 살기가 번뜩거렸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도 서로 주먹질을 하고 주먹질을 할 힘이 없는 사람들도 앉은 자리에서 서로 침을 뱉으며 다툴 정도로 무질서했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교화소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티로 올라설 수 있는 명분을 마련했다. 재정과장이 우리 담당 보안원에게 자기 집 하수로 파는 일에 죄인을 보내달라고 하자 담당 보안원은 나에게 일 잘하는 사람 3명을 데리고 가서 처리해 주고 오라고 시켰다.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 3명과 함께 재정과장의 집으로 갔다. 재정과장은 나에게 “아이들이 도주하지 않는가 잘 보라.”고 하고는 들락날락하면서 우리를 감시했다.

작업 도중 세 사람은 나를 믿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마당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들을 주어 넣었다. 하지만 나는 담배꽁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을 도와주면서 재정과장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담배는 죄인들에게 있어서 곧 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은 담배 3개와 밥 한 덩이를 바꾸어 먹을 수 있었고, 대개 배가 부른 반장이나 취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고 남은 밥을 담배와 바꾸어 주었으니 죄인들에게 있어서 담배보다 더 좋은 화폐는 없었다.

그런 좋은 담배꽁초가 재정과장 집 마당에 그득 널려 있는데도 줍지 않고 있는 나를 다른 죄인들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기회를 엿보다가 재정과장이 집 안으로 들어간 틈에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대개 간부들은 적지 않은 담배농사로 자기들이 피울 담배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늦가을까지 새끼줄에 묶어 말리던 담배를 그대로 마대에 넣어 창고에 두곤 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뻘게지면서도 표가 나지 않도록 담배를 솎아서 겨드랑이와 배에 숨겨 넣고는 얼른 나왔다.

죄인 3명은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창고에 들어가자 간이 콩알만 해져 있다가 내가 무사히 나오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짓을 하며 가지고 나온 담배를 다른 죄인에게 넘겨주고는 또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재정과장이 당장에라도 마당으로 나올까 봐 담배를 조금밖에는 못가지고 나왔는데 금방 나올 것 같았던 재정과장은 아예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시 창고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뱃심 좋게 여유를 가지고 몸에 감출 수 있을 만큼 넣고 나왔다. 나로서는 아주 통쾌한 성공이었다.

“난 조장이 창고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소.”
“글쎄 말이오. 아까 조장이 두 번째 들어가서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 때는 당장 재정과장이 뛰어 나올 것 같아 어찌나 속이 조마조마 하던지!”

일을 끝내고 교화소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흥분 섞인 수다를 떨었다. 교화소 휴게실에 도착하여 담배를 모아 보니 거의 200g 정도가 됐다. 나는 그들에게 믿는다는 의미로 눈을 끔벅끔벅 해보이고는 휴게실 화구간 밑에 담배를 파묻었다. 저녁에 입방할 때 나는 담배 한 뭉치를 배에 숨기고 취사장으로 갔다.

량명학과 나는 신입반 시절 옆자리에 앉았던지라 지나칠 때마다 눈인사하던 사이였다. 내가 취사장에 가자 그는 반가운 기색을 지으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소. 사실 감기에 걸렸는데 감기약이 있으면 좀 주오.”

죄인들은 담배를 ‘감기약’이라고 부른다.

“준하, 감기약을 찾다니 이제 살 만한 모양이지? 나도 약이 없어서 속이 타네.”

나는 배 속에 숨겨 놓은 담배를 그에게 몰래 쥐어주며 눈을 찡긋하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시간에 내 앞으로 밥 세 덩이가 들어왔다. 반장은 감방에서 밥 먹을 때 배식함(그릇을 담아두는 나무함)을 엎어놓고 식탁처럼 그 위에 밥과 국을 놓고 혼자 앉아 먹는다.

작업반마다 모두 똑같았는데, 며칠 전부터 나는 반장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네 줄로 앉아있던 반원들은 두 줄씩 마주앉아서 손에 손을 거쳐 밥을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전달해 주는데, 이때 자기 손을 거쳐 가는 밥덩이와 국을 보면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여기에 취사장 배식공이 내 앞으로 세 덩이의 밥을 넣어주자 모두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준하야, 이게 무슨 밥이냐?”

여느 때는 술렁이던 반원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까 량명학에게 가서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던데 생각지 않게 세 덩이나 주네? 반장 이 밥을 제일 허약한 사람한테 주기요!”
“응. 야! 현철이, 용수, 광호에게 하나씩 주라!”

배식공이 그들에게 밥을 주자 세 명은 밥을 받아들고 기뻐서 잘 먹겠다며 좋아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는 밥덩이를 힐끔거리면서 인상을 구겼다.

반장은 반장대로 배가 고팠지만 허약자들에게 밥을 주는 나를 대견해 하였고, 나 역시 배가 고팠지만 흐뭇한 심정에 우쭐해졌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날 믿고 밥을 넣어준 량명학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교화소 내에서는 고향 사람이라 외면할 수 없어 밥을 한 덩이 더 주었다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고자질을 하여 취사장에서 다른 작업반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정황에서 나를 믿고 밥을 넣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그 밥 세 덩이를 반장과 내가 먹었더라면 담당 보안원이나 교화과 선생의 귀에 들어갔겠지만 허약자들을 먹였던 통에 별일 없이 끝났다. 내가 위험을 무릎 쓰고 재정과장 집에서 담배를 훔쳐서 허약자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나니 감방의 죄인들은 나를 진짜 티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해 벌목반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 먹이다 보니 모두가 나를 좋다고 지지하게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티가 되어버렸다. 일할 때도 옥신각신 다투던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자신들의 의견을 접고 군소리 없이 따라주었으며, 너나없이 내가 삽질하면 삽을 뺏어들며 도끼질하면 도끼를 뺏어들며 나를 도와주었다.

그들이 나를 존경해주고 지지해주니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있는 지혜를 다 짜내어 그들에게 국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자기 집 앞에서만 짖는 똥개’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다른 작업반 사람들과도 친숙해져야 했다. 각 반에서 티로 통하는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접촉하고 개인의 성격 상태, 수준 정도를 파악하여 상대하자니 첫 시작이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담배였다. 남자들끼리의 자존심도 만만치가 않았으므로 나름대로 인간수업을 해가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쟁취해 나갔다. ‘인간수업’은 말로는 네 글자이지만, 헤쳐 보면 쉽지 않은 미묘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 다종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연구하고, 또 그 결론에 따라 남자다운 자존심을 지켜가면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오직 먹을 생각만 하는 반원들과는 달리 나는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짐을 스스로 걸머쥐고, 배가 고파도 웃어야 했으며 힘들고 지쳐 잠을 자고 싶을 때도 머리를 굴려 지혜를 짜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잡부조장 리철, 면식소부 김서일, 낙후자반의 마일, 목공반장 김혁철, 목공반 조장 최광혁, 차수리반장 장송식 등 좋은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죄인들 속에서 인정받는 티가 되었다.

이 중에서 구내반장 김영수와 취사조장 량명학은 나의 첫째가는 손님이었다. 우리 벌목반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절대 입 밖에 내뱉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휴식날 마음 놓고 나에게 놀러와 감방 변소에서 담배를 피우고는 돌아갔다.

또한 우리 반에는 손바느질이 우수한 김재관, 쌍소리와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웃기는 곽만호 등이 있어서 다른 작업반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김재관이 만든 장갑은 공장제품이 울고 갈 정도로 맵시가 있어, 반장들은 물론 보안원들까지도 수없이 나에게 부탁했고, 곽만호의 재치 넘치는 입담 덕분에 휴식일 때마다 다른 반장들은 우리 반에 모여 웃고 떠들었다.

죄인들의 질서를 통제하는 잡부조장마저도 우리 벌목반은 건들지 않았고, 오히려 사 선생의 검열을 사전에 귀띔해 주었으므로 우리 반은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반 티들과도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어느새 반 년 남짓한 기간에 2과, 5과, 4과의 취사장, 티들과도 관계되어 나는 교화소 내에서 최고의 사람부자가 되었다.

나는 구내반장 김영수, 취사조장 량명학과 사업하여 얻은 강냉이가루로 1주일에 한 번씩 우리 벌목반 사람들을 강냉이죽으로 배불리 먹였고, 공무반장의 도움으로 낡은 도끼와 하산바를 모두 새 것으로 바꾸었다.

도끼가 좋아지니 일하기도 한결 쉬웠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강냉이죽이라도 배불리 먹으니 벌목반 죄인들의 얼굴은 다른 죄인들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몇 사람의 허약병을 돌보다 보면 다른 사람이 허약병에 걸리는 판이니 언제나 허약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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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왔다. 여느 때는 눈이 오면 마냥 즐겁고 기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교화소에 입소한 날부터 하늘의 해님도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새싹을 틔우는 나무들, 날아드는 산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 초봄의 봄기운에 속아서 일찍이 피었던 버들강아지도 더는 예전처럼 귀엽게 볼 수도 아름답게 들을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면회실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오늘 어머니가 오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눈길을 돌리는 순간,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힘겹게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뒷모습만 보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어머니였다. 내가 있었던 곳에서부터 면회실까지는 100m가량 되는 거리라 사람의 모습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친혈육, 부모자식 간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잘못 보진 않았을까?’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어머니다. 내 어머니다. 나의 전부고 하늘이었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식이 못 알아 볼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 하고 부르려는 순간 기상벨 소리가 났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봄기운에 눈이 다 녹아 없었는데 때 아니게 마지막인가 싶은 눈송이들이 꿈에서와 똑같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꿈이었지만 왜서인지 어머님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꿈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다가 언제 눈 치우기 작업에 착수했는지도 모르게 작업을 하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꿈에서 본 그 장소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하여 면회실 쪽을 보았는데 글쎄 어머님이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면회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게 꿈인가?’ 그러나 설레던 마음은 가뭇 사라지고 어머니의 힘겨운 모습을 보고 나니 가슴이 아팠다.

죄인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뺏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죄를 지은 나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고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면회를 책임진 관리가 준하를 찾는다는 소리에 담당 관리가 가보라고 하였지만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면회 기다림 칸에 들어서자 면회를 책임진 관리가 직접 대면하는 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분명하였으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떠나올 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어머니는 주름이 많고 머리가 허연 할머니였다.

너무도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준하! 네 어머니가 맞아?”

관리의 물음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았으나 분명히 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가 어려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어머니였다.

“준하야, 그새 앓지는 않았니? 어디 다친 데는 없구? 배고프진 않아?”

어머니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눈가에 있는 눈물 자국을 보았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내 어머니가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면회 관리는 5분도 못 되어 면회를 중지시켰다.

“저는 괜찮으니 오늘처럼 수고로이 오는 일이 더는 없도록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때문에 초라해진 어머니의 얼굴이 말이 아니니 앓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조심해서 가십시오.”

말을 끝내고 나는 인차 나와 버렸다.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밥 먹는 칸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정성껏 해가지고 온 음식들이 내 앞에 차려졌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음식을 보는 순간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어머니!’ 갑자기 속으로부터 뜨거운 뭉치가 올라오면서 목이 메어 통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끝내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그 음식을 한술도 뜨지 못하고 앉아서 울다가 30kg이나 되는 속도전가루만 둘러메고 면회실을 나섰다. 그날 나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우울해 있었다.

“준하야~! 니가 여기서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우울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든든히 먹고 건강하게 교화소 생활을 잘하는 거야.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다잡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 어머니를 위하는 거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나한테는 어머니가 있고 이렇게 좋은 말을 해주는 반장도 있는데 왜 이리 맥을 놓고 있는가. 힘내자! 그리고 배우자. 일도 배우고 사람과의 사업도 배우자.

교화소에서는 허약자들이 생기는 것을 고려하여 속도전가루를 받아주었다. 속도전가루란 강냉이로 만든 가루인데 그 가루를 적당한 양의 물에 넣어 반죽하면 그 반죽이 그대로 끈기 있는 강냉이떡이 된다.

그래서 아무 장소에서나 물만 있으면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루라 하여 ‘속도전가루’라고 하였다. 죄인들끼리는 쉽게 펑펑이가루(강냉이에 높은 압력을 주어 부풀리게 한 다음 튀겨낸 과자를 다시 가루로 빻아 만든 것)라고 불렀다.

그리고 면회 온 사람들에게서 가루를 받으면 그것이 얼마든 면식창고(수인가족들이 면회와서 수인에게 넣어준 식량(면식)을 교화소 차원에서 보관하는 창고)에 바쳤다가 하루에 한 번 저녁 먹기 전에 나가서 500g씩 타서 먹었다.

이 운영을 일명 면식소부(수인들이 면회 때 가족들로부터 받은 식량을 관리하는 사람, 수인이 맡아서 한다)라고 하는 죄인이 관리하였는데 그 자리가 아주 좋은 자리였다. 면식을 나오라는 소리를 듣고 나가려는데 반장이 잠깐 보자고 했다.

“준하야, 너두 알다시피 우리 반의 80%가 허약자들이 아니냐. 그래서 말인데 네가 30kg 가루 중에서 5kg을 교화반에 바쳤으면 좋겠다.”
“예, 그렇게 합시다. 다 같이 고생하는데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죠.”

“고맙다 준하야, 어린 것이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와 주니 정말 고맙다.”
“어머니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어 먹기를 바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가서 가루를 퍼내자니 어머니가 굶으면서 힘들게 마련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이윽고 반장과 함께 5kg의 펑펑이가루를 들고 들어오니 교화반 전체에 화색이 돌았다.

70리터의 철통에 물을 넣고 거기에 가루를 따니 멀건 죽이 되었다. 잘 먹겠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좋았다. 58명에게 작은 그릇으로 두 그릇씩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잠시는 주린 창자를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지 우리 죄인들의 생활에서 굶주림은 한시도 떠날 줄을 몰랐다.

식사가 끝나고 곧 학습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앞에 서서 한 구절을 읽으면 따라하는 식으로 학습하였다. 내용은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와 그 외 교화소에서만 출판되는 일명 "새출발"이라는 신문이었다.

따라 읽기를 2시간 반 동안 하고 나면 취침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꼭 사 선생이 잡부조장과 함께 반별로 점검을 하고, 감방 문을 바깥에서 잠근 다음 해제를 알리는 종이 울려야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그러면 감방에는 정적이 깃들고, 곧 코를 고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다들 지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심심히 떠오르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못난 놈 때문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을 고생을 다해서 왔을 어머니의 걸음걸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결심도, 용기도, 정신 상태도 중요하지만 먹을 것으로 고통을 주는 이 감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세끼 강냉이밥, 그것도 짐승 사료를 수입해 들여온다는 싯누런 완두콩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140g 정도의 밥과 절인 양배추 떡잎 한두 오리가 동동 뜬 냄새나는 소금국으로 하루 세끼 먹으면서 일은 황소같이 하자니 몸이 허약에 안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풀이면 풀, 소똥에 박혀 있는 강냉이, 콩 등 먹을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소똥도 구운 건밀빵으로 보인다는 소리가 거짓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왔지만 나는 매번 가루를 친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돈이 없어 4~5개월 못 오기라도 하면 나도 최악의 배고픔을 겪었는데, 허약병에 걸리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하루 24시간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람은 반정신이 나간다. 나 또한 다른 허약자들과 다를 바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입에 넣었다.

김매기 철에는 온 교화소가 동원되어 모두 김매기를 하는데, 막 자란 파릇파릇한 양배추 잎들을 보안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입에 넣었고, 강냉이모, 고추모, 밥조개, 민들레 등 아무튼 먹어서 독이 없는 식물이란 식물은 한번 툭 털고는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흡사 토끼도 그런 토끼가 어디 있을까 싶다. 뼈만 남은 몸이다 보니 맥이 없어서 두 팔로 호미를 잡고 김을 매야 했고, 입에 문 커다란 밥조개 잎사귀들은 쏘고독~쏘고독~ 손의 도움도 없이 흐물거리는 입술 짬새기로 잘만 기어 들어갔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서 움직일 맥조차 나질 않아 체면도 차리지 않고 면식소부에게로 구걸을 갔다. 전에 어머니가 가져온 기름 한 병을 그가 요구하기에 선뜻 내주었으니 차마 모른다고 못할 거라 생각하고 면식칸 앞에 갔었는데 정작 그를 마주하고 나니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면식자들에게 가루를 500g씩 퍼주면서 나를 반갑지 않게 희뜩거리던 그는 사람들이 다 가고 없자 왜 왔냐고 물었다. 나이 먹은 사람이 내 인상을 보면 알아챘으련만 언제 나한테서 기름을 받은 적이 있냐는 듯이 퍼렇퍼렇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서 “한 번만 도와주오.” 하고 부탁을 했는데 “뭘 도와 달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이런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새끼’라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간신히 참으며 면식창고 열쇠를 채우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면식소부 한 번만…….” 하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확 뿌리치며 “이 새끼 왜 게바라 와서(기어와서) 시끄럽게 해!”라면서 눈을 치뜨고 고아댔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야 이 개새야, 여우새끼처럼 간사하게 기름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재수 없다. 이 새끼야!” 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돌아왔다.

나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마음을 곱게 놀아서는 살아나가기는커녕 남한테 짓밟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승냥이 무리에서 살아 생존하려면 더욱 포악하고 교활한 승냥이가 돼야 하니, 나도 이제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내 눈에는 독기가 항시 사라질 줄 몰랐다.

그래도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나보다 후에 들어오는 나이 많은 신입자들에게는 존댓말을 써주었더니 나중에는 나를 부려 먹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정이 가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과 500g 되는 펑펑이 가루도 조금씩 같이 나누어 먹곤 했는데 자기네한테 면회가 오면 나를 개 닭 보듯 쳐다보지도 않으니 참말이지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존댓말을 써주던 나이 먹은 신입자들에게 반말을 하고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개새끼’ 소리도 입에 달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반장까지도 하룻밤 사이에 180도로 바뀐 내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교화소에 들어가서 제일 힘들던 시기에 다행히도 어머니가 또다시 면회를 왔다. 너무 반가워서 어머니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고, 철없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지금 허약병에 걸리기 직전입니다. 조금 바쁘더라도 세 번만 한 달에 한 번씩 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죽을힘을 다하여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웃는 얼굴로 ‘어머니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라는 말도 없이 찔찔 울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와달라고 했으니 나 같은 후레자식이 또 있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는 내 몰골을 보고 “응! 준하야, 엄마가 어떻게 하든 한 달에 한 번씩은 면회 오마!” 하고는 빨리 들어가서 음식부터 먹으라며 손짓으로 자꾸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는 너무 배가 고팠던 때라 ‘어머니 조심해서 가십시오.’라는 말도 못하고 정신없이 음식을 채 씻지도 않고 입에 걷어 넣었다. 1kg의 밥, 1kg의 찰떡, 돼지고깃국, 김치 한 포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히 먹어치우고 나서야 어머니가 갈 때 잡술 밥은 있는지, 차비는 넉넉한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 인사말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송구스러워 마지막 떡 조각을 씹다 말고 입에 문 채 훌쩍거렸다.

힘들게 죽을 잡수면서도 자식에게 떡과 밥, 따끈한 돼지고깃국을 해온 어머니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심지어 한 달에 한 번씩 와달라니 이게 어디 자식으로서 할 소린가? 그때 얼마나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송구스럽던지 지금도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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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소에 입소한 지 20일이 되는 날 드디어 담화(면담)가 시작되었다. 보안과 비서가 찾는다고 하기에 보안과에 들어가 머리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형식적인 질문이 끝나자 비서가 주의를 주었다.

“준하, 이제부터 교화소 생활을 하면서 일체 죄인들은 물론 보안원들의 동태까지 잘 지켜보고 있다가 나에게 보고해야 한다. 특히 앞으로 널 맡게 될 담당 보안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놓치지 말고 기억해 두었다가 내가 몰래 너를 찾으면 와서 보고해라.”

나는 남의 일을 몰래 고해바치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할 수 있지? 왜 대답이 없어?”
“선생님,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신입자입니다. 아직 여기 실정도 잘 모르고 또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됐어! 알았으니까 나가 봐!”

보안과 비서가 내말을 끊어버렸다. 인사하고 나오면서 얼핏 보니 날 쏘아보는 눈길이 여간 날카롭지가 않았다. 불안한 마음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로 인해서 노동 강도가 제일 세다고 소문난 벌목반에 배치되었다. 전거리 교화소에서는 벌목반 인원이 제일 많았다. 그러다 보니 죽는 사람과 허약병 환자가 제일 많았다.

벌목반은 담당 보안원부터 성질이 포악하고 사납기가 그지없었다. 신입반장이 저녁밥을 먹고 나서 벌목반에 데려다 주었다.

“벌목반장, 이 아이가 준하요, 잘 돌봐주오.”

벌목반장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19살짜리 죄인은 나 혼자였다. 벌목반장은 내 죄명을 묻더니 자기 죄명과 같다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움을 청하라고 하였다. 좋은 반장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다음날 아침 출력(그날 노동을 위해 감방 밖으로 나가는 것)하여 교화소 마당에서 담당 보안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큰 젊은 간부가 빠른 걸음으로 와서 우리들 앞에 섰다.

“신입자들 앞으로 삼 보 나서라.”

나와 함께 전방(轉房)되었던 죄인 2명이 앞에 나섰다. 무슨 말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들어 담당 보안원을 쳐다보았다. 순간 매서운 눈초리가 내 얼굴에 머물러 있음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야! 이 새끼, 너 이리와!”
“준하, 선생님이 널 찾으신다. 앞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아 보고해!”

벌목반장이 머뭇거리며 알려주었다. 간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군홧발이 얼굴로 날아왔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한참 동안 짓밟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때리는 대로 맞았다. 담당 보안원은 한참을 짓밟고 나서야 씩씩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새끼, 어디라고 감히 선생 얼굴을 쳐다 봐?”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잘못했다고 빌었다. 간부는 그때서야 벌목반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반장, 이 새끼 처벌로 밤새 대기근무 세워!”

교화소에는 감방마다 매일 밤 대기근무라는 것이 있었다. 2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은 감시창 앞에 서고, 한 사람은 앉아서 죄인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도합 8명의 사람들이 4개 조로 각각 2시간씩 근무를 섰다.

밤중에 변소나 창문을 뜯고 도주하는 자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사별로 야간근무를 서는 간부들이 감방 앞에 오면 감방 인원을 보고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나는 간부의 얼굴을 쳐다봤다는 죄로 온밤 대기근무를 서야 했다.

그날 저녁 대기근무 예정이었던 사람들은 “준하 덕에 긴 잠을 자게 됐다.”면서 좋아했다.

대기근무를 서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담당 보안원이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처벌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새 대기근무를 서느라 몹시 피곤했지만 그래도 아침밥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신입자들 들어라! 앞으로 일주일 내에 각자 자기 도끼와 하산바(산에서 작업한 나무를 끌고 내려오기 위해 몸에 부착하는 쇠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해라.”

반장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일주일 동안은 휴게실에서 잡일이나 하면서 산에 가서 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교화소로 오기 전에 사회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나는 교화노동이 두려웠다.

오후 4시쯤 벌목반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갔던 하전사 초병이 들어와서 휴게실에 남아 일하던 죄인 6명에게 교화반의 작업장으로 나가라고 지시했다. 나와 5명의 죄인들은 초병을 따라 어느 산으로 갔다. 무척 멀리도 갔었다.

뛰다시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우리에게 나무를 한 대씩 메고 교화소로 돌아가라고 시켰다. 교화반이 작업한 나무 중에 6대가 남게 되었는데 우리를 데려다 운반을 맡긴 것이다.

담당 보안원은 제일 굵은 나무를 가리키면서 나에게 옮기라고 했다. 안간힘을 쓰면서 겨우 어깨에 걸치기는 했지만 봄철 물먹은 박달나무라 도저히 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10m도 못 가서 다리가 떨리고 어깨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 씩씩거리며 한참을 갔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주저앉고 말았다.

“준하야, 담당 보안원에게 맞을라. 어서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라.”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니 벌목반장은 나보다 더 큰 나무를 메고도 힘든 내색 없이 서 있었다. 벌목반장이 옆에서 도와준 덕에 다시 나무를 메고 걸음을 떼었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나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깨의 피부가 다 벗겨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확확 뿜어 나와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때 담당 보안원이 지팡이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이 새끼, 빨리 안 메고 뭘 꾸물거려? 빨리 안 갈래?”

쌍욕을 하면서도 때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맞지 않으려면 그 나무를 메고 빨리 앞서 가야만 했다. 무슨 정신에 그 나무를 메고 뛰었는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어쨌든 그 밉살스러운 박달나무를 혼자 힘으로 메고 휴게실 앞까지 당도했다. 어깨에서 나무를 내려놓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도 흐느낌도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눈물이라는 것이 이런 거로구나!’

슬펐다. 어머니의 사랑밖에 모르고 자란 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앞으로 당해야 할 고통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과연 내가 이 힘든 교화 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까?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벌목반장이 밖으로 불러냈다. 영문도 모른 채 반장의 뒤를 따라 병방(病房) 위생원에게 갔다. 위생원은 반기는 기색으로 반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 준하 어깨에 소독약을 좀 발라주오.”

반장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하, 준하가 반장을 잘 만났구나?”
“우리 준하를 아오?”
“신입반장 코밑에 붉은 기를 날리게 한 준하를 모를 리 있나?”

반장은 그때서야 알겠다는 듯 농담을 해대는 위생원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취침시간이 되어서 자리에 눕자 낮에 있었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문득, 담당 보안원이 왜 나를 미워하는지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는데 어떤 죄인이 와서 담당 보안원이 찾는다고 말해주었다. 담당 보안원 사무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새끼, 문건을 보니 살인이구나?”

담당 보안원이 내 문건을 보면서 왜 사람을 죽였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사탕장사를 해서 한 푼 두 푼 모아둔 돈을 빌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돈을 갚지 않기에 제가 직접 받으러 갔는데, 도리어 술에 취해서 도적이 매를 드는 식으로 나를 때리려 하기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지라 비틀거리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땅에 박혀 있던 뾰족한 돌조각에 이마를 찧었습니다.”

“그래서 때린 건 딱 한 대야?”
“예.”
“그 자리에서 죽었어?”

“아닙니다. 일으켜 세우니 정신이 멀쩡한 채 나더러 10일 후에 갚겠으니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병원에 실려간 지 3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제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흥, 그래서 아직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개새끼야! 네 죄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선생님들 말을 듣지 않는 거 아냐?”

나는 욕설을 퍼붓는 담당 보안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태가 파악됐다. 지금까지 가해진 모든 것이 보안과 비서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던 일이었다. 욕설은 계속됐다.

“이 새끼, 너! 네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지, 아니면 죄를 인정하지 않고 요령이나 피우면서 교화노동에 몸이 상하는지 내가 똑바로 지켜 볼 거야! 만일 죄를 뉘우치고 일을 열심히 하면 살아나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내 손에서 살아 나갈 궁리를 하지 말라. 알았어? 이 새끼야!”
“예.”
“가 봐!”

인사를 하고 휴게실로 돌아왔으나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담당 보안원은 보안과 비서의 사주를 받고 날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좋은 말로 노동으로써 죄를 씻고 당당하게 출소하라고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살아나갈 궁리를 하지 말라니, 세상 어디에 이런 감옥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교화노동에 충실했다. 나무 찍기, 절단, 가지치기 등 죄인들은 모든 일을 도끼로 하였다. 아직 뼈도 굳지 않은 애송이라고 다들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잘하든 못하든 앞장서서 일하려고 노력했다. 죄를 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아나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노력을 해야만 열매를 딸 수도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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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제범교화소 중의 하나인 ‘제12교화소’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청진 방향으로 30리쯤 떨어져 있는 ‘전거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0리쯤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회령에서 청진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전거리가 있고 우측에는 풍산리가 자리하고 있다. 큰 길에서 전거리로 들어가면 기차가 다니는 철다리 밑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이 전거리 입구다.

이 철다리 밑에서부터 약 1.5km 정도 치안대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차단초소(검문소, 차나 사람을 단속)가 있는데, 이 초소는 제12교화소 산하 경비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이 초소를 거쳐 빠른 걸음으로 30분쯤 걸어가면 제12교화소에 도착한다.

전거리에서 회령 쪽으로 30분가량 가면 조선인민군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초소가 있다. 이 초소에서는 유동인구의 신분증 및 여행증명서, 소지품 검사를 담당한다.

전거리 교화소는 수용인원이 약 2,000명 수준이다. 이 교화소에는 경비대 초병들까지 합쳐서 보안원만 약 300명 규모다.

이 중 직발입대초병(군대에 뽑혀 바로 전거리 교화소로 들어간 사람, 한국의 경비교도대와 같음) 60명, 가족과 함께 살림을 하는 30~35세 초병이 10여 명, 미혼인 ‘특사’ 계급 초병이 10여 명 정도 된다. 그 외 견장에 별을 달고 있는 보안원이 약 220여 명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 초모(군인(초병) 모집)가 아닌 안전부 초모로 입대한 초병들 중에서 교화소 초병을 선발하는데, 한마디로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집 자식들이 교화소 초병으로 선발된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뿐만 아니라 초병들도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죄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죄인들을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나무하러 산에 오르면 무조건 제일 꼭대기에 서 있어야 하고, 바지를 적시는 한이 있어도 용변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그 무거운 무기장구류를 하루 종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초병은 무게 3.2kg짜리 68식 자동보총(소련제 AK 소총을 개량한 AK-68소총), 실탄을 채운 탄창 2개를 늘 소지한다. 때문에 교화소 초병들의 얼굴 표정은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죄인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항상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제12교화소는 본소(本所) 건물 외에 본소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동정광(원광을 선광하여 동(銅)이 들어 있는 것만을 갈라낸 광석)을 캐내는 2과와 5과가 분소(分所)로 자리 잡고 있고, 본소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해발 1,000m 높이에 4과가 분소로 위치해 있다. 1과와 3과는 본소에 포함되어 있다. 흔히 본소를 ‘전거리 교화소’라 부른다.

전거리 교화소에는 교화소 소장을 우두머리로 그 밑에 부소장, 정치부장, 간부과장이 있고, 1~5과에는 과장, 비서급 보안원, 관리보안원 및 일반 보안원들이 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전거리 교화소는 1970년대 말에 "제22호 청년교양소"라는 명칭으로 세워졌으며 그때는 교화소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가 6m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에 "제12교화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도 8m로 높아졌다. 지금도 전거리 교화소의 콘크리트 담벽은 20여 년 전에 추가로 쌓은 담벽의 모습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교화소 체계는 크게 1~5과로 분류되며 보안과, 교화과, 생산과, 재정과, 노동행정과, 간부과 등이 있다. 2과와 4과, 5과를 통솔하는 별도의 분소 소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소와 2개의 분소에는 각각 죄인들을 관리하는 관리보안원, 과장, 비서들이 존재한다.

본소 콘크리트 담벽은 한 변이 약 120m 길이의 정사각형과 유사하며, 그 안에 감방, 창고, 낙후자 휴게실, 목공반, 설계반, 공무반, 구내반, 취사장, 벌목반, 병원, 약국, 상하차반(상차, 하차가 있고, 작업한 것을 싣고 부리는 일, 작업조 이름), 차수리반 등 반별 작업장들과 휴게실이 들어차 있다.

두 개 분소는 콘크리트 담벽이 아닌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으며 이 울타리 형태는 고압선으로 된 3m 높이의 전기 철조망을 중심으로 양쪽 3m 거리에 똑같은 높이의 가시철조망이 있어 총 폭이 6m의 3중 철조망이 자리하는 셈이다.

교화소 간부들의 가족 수는 대략 800~900여 명 규모이며, 극소수의 일반 사회인들이 본소를 중심으로 위로는 상동마을 12가구, 아래로는 차단초소에서 1.2km 거리에 위치한 하동마을 30여 가구 정도가 살았다.

중동마을은 교화소 담장 동서쪽으로 나뉘어 160여 가구가 살았다. 이렇게 제12교화소는 1개 본소, 2개 분소, 10여 개의 과로 나뉘어 죄인들을 관리하고 있다.

보안원들이 사용하는 시설을 제외한 죄인들 시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다. 감방, 작업실, 휴게실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필수품과 위생시설은 아주 먼 옛날 갓 쓰고 당나귀 타고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입소했던 당시에는 죄인들의 감방이 짐승들 우리보다 못했다. 벽과 천장, 바닥은 모래와 나무톱밥의 비율을 3:1로 맞추어 석회가루 풀어놓은 물에 반죽해서 만든 것으로 발랐다. 조선에서는 이 반죽을 ‘사마로’라 하는데 시멘트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얼마 못 가 가루가 떨어진다.

그래서 죄인들은 식사시간마다 천장이나 벽에서 덩어리가 떨어져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신입자 시절에 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 사마로 폭탄 세례를 맞은 적이 있었다. 밥을 국에 말지 않았으면 가루를 긁어내고 먹으면 그만인데 밥을 국에 말아버려 황당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하도 배가 고파서 톱밥과 모래가 섞인 밥을 훌훌 들이마셨다. 사마로가루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빈대, 벼룩들이었다.

명절 휴식일에는 밝은 낮에 모든 감방 사람들이 함께 이잡이를 하는데, 이것들이 생존방식을 터득해서 우리가 옷을 벗어 손톱을 갖다 대면 옷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과 벽의 틈새로 숨어버렸다.

물론 밤이 되면 다시 사람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시커먼 바닥은 대낮에 들여다보아도 숨어 있는 이들을 찾기 힘들었으며 명제카드(김정일의 교시를 적은 10장짜리 종이)나 준칙판 등은 죄다 빈대의 소굴이었다.

죄인들은 감방에 있는 동안 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열과 오를 맞추어 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정자세로 앉아 있는 자리가 곧 잠자리가 되었다. 반장들이 제구실을 못하는 감방에 가면 천장에 거미줄까지 늘어져 있어 그야말로 소 외양간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 빈대, 이, 바퀴벌레, 모기가 1년 내내 득실거리니 차마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감방 안에는 변소가 달랑 하나 뿐인데, 항상 변 냄새가 가득 차있다.

그러나 교화소 생활이 오래되면 이 냄새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변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죄인일지라도 다른 냄새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가끔 감방 안에서 위생검열이 진행되는데 감방을 돌아보는 보안원들은 모두 인상을 찡그린 채 코를 싸쥐고는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상부에는 아주 깨끗한 환경조건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는 것이다.

죄인들에게서 나는 악취는 야외에서도 여전히 났다. 교화소 밖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회 사람들은 죄인들의 대열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코부터 막는다.

반장들이나 극소수 깔끔한 죄인들은 그래도 열흘에 한 번 정도 옷을 빨아 입었지만 대다수 죄인들은 일 년 내내 입은 옷 그대로 잠을 자고 입은 옷 그대로 일을 했다. 그러니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천 명의 죄인이 수용되는 본소에는 50평방미터쯤 되는 세면장이 딱 하나있다. 세숫대야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벽돌로 쌓아 시멘트를 바른 물탱크가 하나 있을 뿐이다. 거기서 물을 길어 세면을 할 수 있도록 반마다 나무욕조를 10개씩 만들어 세면장 한쪽 구석에 쌓아 놓고 사용하도록 했는데, 대충 못을 박아 만든 욕조라 물이 채워지지 않았고 다 새버렸다.

죄인 전체가 세면을 하려면 일단 물이 턱없이 부족하고 시간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한 줄로 서서 세면장에 들어가면 각자 들고 있던 수건이나 천조각을 물탱크에 한 번 넣었다가 꺼내서 그것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꾸물거리거나 물탱크에 천을 두어 번 담그면 욕조 위에서 죄인들을 주시하는 세면장 관리의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왔다.

교화소에서는 인원수에 상관없이 교화반마다 1년에 이불 한 채, 분기마다 신발 7~12켤레, 솜옷과 내복 등을 지급한다. 그나마 이것도 담당 보안원들이 절반을 빼돌리니 죄인들의 옷과 신발 등 생필품 실태는 처참한 수준이다.

옷은 누덕누덕 기워 입고, 신발은 바닥이 다 닳아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훤히 보인다. 가끔 보안원들 집에 농사일을 해주거나 집수리를 해주러 들어가 보면 집집마다 꿀을 채취하는 벌통이 있는데 그 벌통에 씌워지는 보온막은 모두 죄인들에게 지급됐어야 할 옷이나 이불을 찢어 만든 것이었다.

보안원들은 매일 죄인들의 옷차림과 신발 상태를 눈앞에서 보고 살았지만 죄인들에게 지급돼야 할 생필품들을 빼돌려 돼지굴, 개집, 벌통의 보온용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우리 죄인들을 자기 집 우리에 있는 개, 돼지보다 값어치 없는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감방에 전기 시설은 달랑 전구 하나였다. 그것마저 전압이 100V도 못 되니 전구 하나가 촛불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녁식사 후 학습시간이 되면 눈이 다 침침해졌다.

겨울철이 되어 감방 통로에서 난로를 피우면 연기가 밖으로 빠지지 않고 감방 안으로 들어와 복도가 연기로 자욱했다. 그래서 밤마다 연기 때문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가며 생활해야만 했다.

교화소에서 보안원들이 제일 욕심내는 보직은 보안과였다. 내가 교화소에서 생활할 때 보안과장 이름이 남병식이었는데, 당시 40대 후반에 165cm 정도의 체격을 갖고 있었다.

보안과장은 국가비밀 특수수사요원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교화소 소장도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못하는 존재였다. 나도 이 사람에게 세 번이나 취조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눈빛이 아직까지도 잊혀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게 죄인들을 대하지만 취조할 때는 감히 마주보기 힘든 위압감과 날카로움으로 죄인들을 압박했다. 또한 취조가 끝나면 다른 보안원들과 달리 아주 세심하게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자유자재로 죄인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캐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보안과는 죄인들뿐만 아니라 담당 관리보안원과 교화소 내의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반당적인 행동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때문에 보안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을 ‘게스타포’라고 부르며 보안과 간부들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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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칙칙한 잔비가 내리는 교화소(감옥, 징역형을 받은자들을 구금하는 시설) 철문 앞으로 옷이 축축이 젖은 채 초라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19살 된 한 소년이 있다. 그가 본의 아니게 살인죄를 짓고 교화소에 입소하는 나 리준하다.

터벅터벅 걸어서 철문 앞에 멈춰서 보니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철문이 앞에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 있는데 갑자기 공기를 째는 날카로운 초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가리 떨구라!”

엉겁결에 머리를 숙였는데 ‘꽈르르릉~~’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교화소 철문 열리는 소리였다.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뒤통수에 타격이 왔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던 어방둥이(모자란 사람) 새끼야?”
“대가리 숙이고 빨리 기어 들어가!”

아픔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데 뒤에서 그 철문 닫히는 아츠러운 소리에 머리끼가 오싹해왔다. ‘꽈르릉~ 꽝~’ 너무 무서워 눈도 뜨지 못한 채 서 있는데. “야 임마! 날 따라와”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한 보안원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기며 이리저리 살펴보니 오른쪽에 크고 시커먼 붓글씨로 "도주자는 쏜다!",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라는 글이 무시무시하게 써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계속 따라가면서 왼쪽을 보니 팔에다가 위생표(+)를 붙인 죄인들이 자주82호라는 큰 차에다가 통나무 같은 것을 마구 적재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무인 줄로만 알았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죽은 죄인들의 시체였다. 순간 가슴이 후두둑 뛰면서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는 죽었구나’ ‘감옥에 가면 80%는 모두 허약에 걸려 죽는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안원을 따라서 나는 ‘사’라고 불리는 보안원들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다. 그 보안원이 들어가면서 뭐라고 말을 하자 곧 소위를 단 군의라는 자가 나왔다.

“돌아 섯! 바지 내렷!”

집안도 아닌 밖에서, 그것도 여러 죄인들이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바지를 벗으라고 하니 참 기가 막혔다. 주춤거리다가 팬티만 남겨두고 바지를 벗었다.

뒤에서 노려보던 군의라는 자가 갑자기 내 급소를 걷어찼다.

‘악~’

너무 큰 통증에 허리를 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군홧발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억울하고 분하기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면서 팬티를 벗고 위생검열을 마쳐야만 했다.

렌트겐(X-ray) 촬영실에 가서 촬영까지 마치고 나자, 그 보안원은 “야, 신입반장! 이 새끼 입소시키는 문건 작성해!” 하고는 날 데리고 신입반이라는 데로 데려갔다.

뒤따라가면서 보니 감방 복도에 연기가 꽉 차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각 감방을 데우는 화구간(불을 떼는 곳)이 복도에 있는데 불이 잘 붙지 않아 연기가 심하게 났었다.

이윽고 신입반이라고 쓴 복도 한 끝에 있는 감방 앞에 이르렀다. 그자가 문을 열고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기에 나도 그래야 되는 줄 알고 신을 신은 채로 들어섰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나의 귀뺨을 때렸다.

“이 새끼 어디라고, 신발 벗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군의라는 새끼한테 얻어맞은 것만 해도 분해 죽을 지경인데, 같은 죄인이 날 죄인 다루듯 한다는 생각에 분을 참을 수 없어 주먹을 휘둘렀다. 그자가 피를 뿌리며 방바닥에 엎어지자 앞에 앉아 있던 8명의 죄인들이 나에게 몰매를 안겼다.

구류장에서 150일을 앉아 있던 터라, 다리맥이 다 풀린 나는 저항도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너무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병방(수인들 치료실)이라는 곳이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었던 나를 여기에다 눕혀놓은 모양이다.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위생원(수인이 맡아서 일한다)이 와서 맥을 짚어보는 것이었다.

“너 몇 살이냐?”
“19살입니다”
“너무 어리구나. 어린놈이 무슨 죄를 지었냐? 도적질?”
“아닙니다”
“그럼?”
“145조 2항입니다”
“음,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살인을 쳤냐?”

내 입으로는 도저히 사람을 죽였다고 할 수가 없어서 법조만 얘기해 줬는데 그 위생원은 알고 있었다.

“위생원도 살인으로 들어왔습니까?”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침을 잘못 놔서 사람이 죽었다. 실수로 간을 찔렀거든. 원래는 의사였다”

가슴팍을 보니 리학모라고 쓴 이름과 죄수번호가 보였다.

“여기서 4년을 살았다. 이제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래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허~ 좋기야 좋지”

“준하야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참는 법을 배워라! 음~ 여기 이런 말이 있다. 못 본 척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면 살아 나간다. 내 보기엔 너도 사람 됨됨이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살아서 여기를 나가겠거든 오늘 같은 행동은 삼가해라. 옆에서 너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고 또 네가 자리를 잡았는데도 계속 억울하다면 싸우고 분하면 분노를 터뜨려라. 그러기 전에는 절대 니 맘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두 겉보기엔 다 거친 죄인들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집단인 만큼 정이 흐른다”

잡부 일을 하는 죄인이 와서 의사 선생을 찾는다고 알려주자 그는 곧 나갔다. 위생원은 나갔지만 웬일인지 그가 한 말이 귀에 쟁쟁했다.

“사람들이 사는 집단인 만큼 정이 흐른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삶의 희망이 보일 듯했다. 한참 누워있노라니 전날 저녁 기차역에서 눈물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지금 어머니는 뭘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은 어느새 고향을 떠나던 그날의 기차역으로 이어졌다. 족쇄를 차고 두 명의 계호원과 함께 기차역 보안원 대기실로 들어가던 나는 친척을 배웅하러 나왔던 친구 영춘이를 만났다.

“준하야!”

나를 보자 반가움에 달려오던 영춘이가 계호원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고는, 눈이 둥그래서 나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를 호송하던 계호원들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내가 떠나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면 혹시 도주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심리적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집에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눈물이 글썽해 있던 영춘이가 내 눈짓을 보고는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우리 엄마한테는 물론 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라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다행히 그날 내가 타고 떠날 기차는 사정에 의해서 1시간 반 동안 지연되었다.

영춘이가 어머니와 함께 제일 먼저 도착하고 그 뒤로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님들 몇 분, 어머니 친구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도착하였다.

계호원들은 역내 보안원실 문을 걸어 잠그고 만나지 못하게 하다가 담배와 술 같은 뇌물을 받고 나서야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눈물만 흘리며 말을 못했다.

“울지 마시오, 어머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앓지 말구 건강해야 합니다. 꼭 살아서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일 뿐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준하 엄마! 울지마오. 우리 준하는 어릴 때부터 돌 꼭대기에 올려놔도 살아날 놈이라고 했는데 어딜 가든 살아올 거요”

모두들 고무와 격려의 말로 어머니를 위안했고, 떠나는 나에게 힘을 주었지만 나는 그분들을 떳떳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제발 이 순간이라도 족쇄를 좀 풀어주시오”

어머니의 간청을 듣고 성혁 계호원이 마뜩치 않은 눈으로 보다가 마지못해 내 손목의 족쇄를 벗겨 주었다.

“영춘아, 성준아, 그리고 광일아, 내가 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앓지 말고! 부모님들 말씀 잘들어라! 그리고 우리 엄마 나 올 때까지 니들이 잘 좀 돌봐드려라”

“준하야, 어머니 걱정말구 가서 몸조리 잘해라. 교화소라는 델 가면 다들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던데……. 기다릴 테니 죽지 말고 꼭 살아가 돌아와야 한다”

친구들은 물론 바래주러 나온 모든 분들이 걱정해주고 나름대로 힘을 주었다.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족쇄를 찬 손을 내밀고 모든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보았다.

“모두들 앓지 말고 몸 건강히 계십시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따라오면서 “준하야~ 준하야~” 하고 부르짖었다. 기차가 점점 속력을 내는데도 어머니는 내 손을 더 억세게 틀어쥐었다.

‘이러다가……’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서 얼른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준하야~”

순간 나는 이때까지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애원에 찬 부르짖음이 귀전에서 멀어져 갈수록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격정으로 목이 메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불을 붙여 담배를 입에 물려주기에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한참 눈물을 떨구며 담배연기를 삼키고 나니 마음은 좀 진정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 찢어지는 가슴을 어찌하랴.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플진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교화소로 보내는 어머니의 그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며 열아홉 해를 남편 없이 혼자 살면서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산 어머니. 먹을 것이 없어서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굶어죽곤 하던 그 어렵고 힘든 고난의 행군 시절 당신은 굶어서 얼굴이 부석부석해지면서도 내 죽그릇에 당신의 몫을 덜어 주던 어머니,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사랑하는 자식을 다른 데도 아닌 교화소로 보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그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날 역전에서 자식을 애타게 부르며 철길 옆에 엎어져서 우는 어머니를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정신이 들자 신입반장이 나를 다시 신입반으로 데리고 갔다.

“이 개새끼야, 맞고 나니 정신이 좀 드냐? 맛 좀 더 볼래?”

참았다. 아니 참아야만 했다.

“이제야 풀이 좀 죽었구나. 이 새끼야 신임반장 3년 하면서 너 같은 새끼는 처음 본다. 어디다 대고 감히 반장한테 대들어?”

한참 핏대를 돋우던 그는 죄명이 뭐냐고 물었다.

“145조 2항입니다.”
“흥~ 살인자 새끼니까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뎀비지.”

그래도 참았다. 기운이 없기도 했다. 이어 내 이름, 집주소, 나이, 친척관계 등을 물어 문건을 만들어서는 나가버렸다.

“준하! 너 저기 제일 뒤에 가서 앉아라.”

부반장이라는 사람이 지정해주는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머리를 깎아야 하니 또 옷을 벗으란다. 나는 구류장에 가위가 없어서 머리를 깎지 못하고 왔었다.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 가 앉았다.

쑥덕쑥덕.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아깝다고 느꼈던 적은 처음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중머리를 하고 앉아 있노라니 창문 짬 새기로 들어오는 찬 기운에 머리가 시렸다. 내 교화소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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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류장에 돌아온 후에도 어머니와 친척들이 들여보내는 음식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구류장에 있는 죄인에게 음식을 넣어주려면 계호원들에게 담배 한 보루씩 쥐어줘야 했는데 어머니 형편에서는 그런 고급 담배를 장만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계호원들은 담배나 술을 바치는 사람들의 음식만 전달해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먹어치우거나 떡봉이에게 줬다. 그러다 보니 권세 있는 사람들은 구류장에서도 집에서 해오는 밥을 먹었지만 나 같은 평백성들은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치사하게 음식으로 농간질하는 감옥은 이 세상 천지에 조선(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말로만 떠들 뿐 구류장 간부들이 벌이는 짐승 같은 수작은 정말 치 떨리는 것들이다.

철민이라는 21살짜리 계호원은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죄인들에게 입을 벌리게 해서 거기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분노한 죄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예심원에게 항의하여 침 뱉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몽둥이질이 더 늘었다.

내가 구류장에 있을 때 계호 책임자는 3호 감방에 있던 32살의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을 발설하면 평생 교화소에서 썩게 하겠다고 협박하여 한 여성의 인격을 악질적으로 파괴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붙잡혀 온 이 여성은 훗날 이 사건이 남편에게 알려져 이혼을 당하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간부들의 악행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호원 성혁이는 감방에서 악취가 난다며 세면장의 얼음물을 퍼다가 감방 안에 쏟아 붓기도 했다. 그래서 난방도 안 되는 한겨울에 하루 종일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또한 죄인 한 명이 잘못을 하면 감방 전체 죄인들에게 벌을 주는 것도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다.

계호원들은 툭하면 죄인들을 철창에 매달리게 했는데, 철창에서 떨어지는 죄인들에게는 몽둥이질을 가했다. 12명이 사람 위에 사람이 매달리는 식으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리는 그 인간들의 누런 이를 볼 때면 승냥이가 떠올랐다.

구류장 변기에서는 항상 악취가 났다. 변기 아래에 있는 수로는 계호원들이 사용하는 세면장의 물탱크에서 물을 틀어야만 물이 흐를 수 있었는데, 계호원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하루에 한 번밖에 물을 틀지 않았고 죄인들이 대변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계호원들에게 보고하지 않고 몰래 대변을 보다가 매를 맞는 사람, 변비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구류장 감방 안에는 변기 위로 조그만 공기창이 있었는데, 가끔 사람들이 공기창에 매달려 한 사람이 세 모금 빨면 밑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세 모금 빠는 식으로 12명이 번갈아 가며 몰래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계호원들이 난로 옆에서 담배를 피다가 버린 꽁초를 주워서 피웠다. 그 방법 또한 절묘했다. 나는 담요에 있는 실을 뽑아 아주 얇게 꼬아서 길이가 5m 정도 되는 끈을 만들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버선을 벗어서 한쪽 끝을 끈과 연결해 좁은 배식구 구멍으로 팔을 뻗어 난로 옆으로 던지면 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계호원이 감방 철문 안으로 들어오는지 안 오는지를 감시했다.

그렇게 버선을 던져서 끈을 잡아당기면 담배꽁초까지 끌려왔다. 이 방법을 옆 감방 사람들이 보고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감방마다 양말, 버선 등이 동원되어 경쟁적으로 난로 옆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획득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결국 6호 감방 사람들이 담배꽁초 낚시질을 하다가 계호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밤 6호 감방 사람들은 바닥에 땀이 흥건하도록 벌을 받고 녹초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조선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참상을 세상에 고발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계호원들은 가족들이 보내준 음식들을 난로 옆에 모아 두었다가 발로 툭툭 차서 철창 배식구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배식시간에 그 음식들을 국통에 모두 쏟아 넣고 국자로 휘휘 저어서 돼지 사료처럼 만들어서 죄인들에게 주었다. 아마 자기들 집에서 개를 키운다면 개한테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호원들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미는 사람의 얼굴에 뜨거운 국을 쏟아 부어 화상을 입히기도 했다.

죄인들을 때리는 참나무 몽둥이에 못을 박아 사람을 반주검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들의 만행은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떠한 징벌을 가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지난 일이지만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라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니 형기를 감하여 줄 것을 건의합니다.”라는 단 한 마디만 남겼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구류장의 간부들은 내가 최소 교화 10년은 받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판사가 7년을 선고하자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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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장에 들어간 지 8일째 되던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오전 11시경 계호 책임자가 감방에 들어왔다.

“준하! 너의 어머니가 이 추운데 너에게 밥 먹이겠다고 정문 앞에서 보안서장 자동차를 가로막아 난리가 났다! 너희 어머니 같은 사람 흔치 않아! 어머니 잘 만난 줄 알고 생활 잘해!”

계호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네 엄마 배가 불룩해서 뭔가 했더니 밥이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있더라!”

나는 계호원을 따라 면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파랗게 얼어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준하야, 배고프지? 아픈 데는 없니? 춥지? 옷 가져 왔으니 우선 옷부터 입어라!”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오.”

어머니가 가져온 옷을 입고 나니 추위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면회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어머니, 빨리 나가오. 조금 있으면 정치부장(정치사상사업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직책)이 온다니까 그 전에 빨리 나가시오!”

담당 계호원의 성화에 나와 어머니는 몇 마디 말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보안서장에게 부탁하여 밥을 넣어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받아먹지 못했다. 계호원들이 중간에 농간질을 하여 계호원들의 잡일을 도맡았던 죄인 떡봉이에게 그 밥을 모두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면회한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어머니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꾀를 냈다. 나는 형을 선고 받고 교화소에 가기 전에 어머니와 단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맹장이 터진 것처럼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오후 4시부터 오른쪽 아랫배를 쥐고 뒹굴었다.

그때가 리종수 계호원의 근무시간이었는데, 그는 내가 아파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며 아예 대기실에 앉아 철문까지 닫아버리고 상부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배를 쥐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의 다른 죄수들도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윽, 어후~ 아!”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뒹굴어도 리종수 계호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의 근무가 끝나고 성혁이라는 22살짜리 어린 계호원이 근무에 들어왔다.

“이거 어느 새끼가 고아대? 주댕이를 콱 문질러 버리고 말까보다. 어느 새끼야?”

계호원 성혁이는 악을 쓰며 뒹굴고 있는 나를 보자 대뜸 난로 옆에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더니 “야, 창호! 그 새끼 이쪽으로 끌고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끌어 철창 밑 배식구 앞에다 눕혀 놓자 그는 철창 사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 이 아픔을 참아야만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몽둥이질을 하건 말건 배를 움켜쥐고 계속 뒹굴었다.

계호원 성혁이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인자 새끼, 콱 썩어져라!”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저녁 10시경 계호원 영호가 근무를 교대하면서 내 비명소리를 듣고 전화로 계호 책임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계호 책임자는 감방에 도착하자 조용히 창호 형을 불러서 내가 꾀병인지 아닌지 묻더니 창호 형과 다른 죄인 한 명에게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내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고, 창호 형의 등에 업혀 나는 군(郡)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중학생 시절 친구 영춘이가 학교 수업 중에 맹장이 터져서 그를 업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영춘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질문과 진찰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의 기억 때문에 의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내 배를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에게 통증이 시작된 시간을 묻더니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피검사를 못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덜컥 겁이 나 있었다. 계호원의 몽둥이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꾹 참고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후회가 몰려왔다.

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계호원과 창호 형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의사 단둘이 수술실에 남게 됐다.

“너 꾀병이지? 솔직히 너 아픈 기색이 안 보인다.”
“예? 어째 병원에 오니까 아프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떠보기 위한 의사의 질문에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아프지 않으니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의사는 오히려 긴장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맹장이 터져 버려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의사는 곧장 긴급수술을 결정했다. 오히려 맹장이 터진 환자를 이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을 책망했다.

나에게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했던 계호원 성혁이는 “준하야, 너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 수술 잘 받고 와라!”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홀딱 벗고 수술실로 들어가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술대에 눕자마자 의사가 내 두 팔을 수술대에 묶더니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다 보니 그 고통이 엄청났다. 칼을 대는 배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속이 메스껍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뱃속을 살피던 의사는 내 얼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들더니 “너 정말 배가 아프긴 아팠니?”라고 물어왔다.

“선생님, 사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로 아프다고 했습니다. 달아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 그냥 어머니와 며칠간 병원에 있다가 교화소에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의사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계호원을 속이고 내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승인해줬다. 가른 배를 꿰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리가 뒤틀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봉합이 끝나고 나서 나는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고통을 참느라 팔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팔이 굳어서 구부려지지 않았고 몸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의사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서 옷을 챙겨 입고 204호 병실로 움직였다. 수술실 바닥에 흘려진 피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핑핑 돌고 연신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 2층 병실까지 갔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아침 7시가 돼서야 멎었다.

나는 의사의 배려로 일주일 뒤에 뽑아야 할 실을 10일 뒤에 뽑았다. 실을 뽑고 구류장으로 돌아가던 날, 보안서 정문 앞으로 배웅 나온 친구와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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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간의 구류장 생활은 놀라움과 함께 모멸감으로 얼룩졌다. 구류장에 도착해서 처음 3호 감방 안에 들어갔을 때 총 8명의 죄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어디서 요런 삐에로가 들어왔나?”

반갑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인지 감방장이 나에게 던진 첫 말이다.

“야, 감방장!”
“예.”
“그 새끼, 살인자 새끼야. 교양 좀 해라.”
“알았습니다.”

말이 끝나는가 싶더니 감방장이 내 배를 걷어찼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발길질이 생각보다 약했다. 맞은 둥, 마는 둥 그냥 서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감방장은 조금 당황해 하더니 이번에는 주먹으로 내 얼굴을 치려고 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양 옆으로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도 엎어뜨렸다.

감방장이 얼굴을 싸맨 채 비명을 지르고, 두 사람이 땅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뒹굴자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만 꽥꽥 지를 뿐 덤비지는 못했다.

철창 밖에서 상황을 이해한 말단 계호원이 난로 옆에 있던 쇠갈퀴를 들고 감방 문을 열며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철창 문 밖으로 나가자 간수들 둘이 쇠갈퀴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나를 내리쳤다. 나는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두 팔이 늘어질 때까지 죽도록 맞아야 했다.

계호원들은 반죽음이 된 나를 4호 감방으로 끌고 갔다. 감방 안에 있던 죄인들이 시체처럼 늘어진 나를 차디찬 돌바닥에 눕혀 놓았다.

온몸이 쿡쿡 쑤시고 뒤통수가 땅기면서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왔다. 이가 ‘탁탁’ 부딪칠 만큼 온몸이 떨려왔다. 제일 뒤편에 앉아 있던 창호라는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기가 깔고 앉아 있던 담요를 내게 덮어주었다.

잠시 후 구류장 복도로부터 불고기 냄새가 풍기면서 죄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감방 앞쪽 난로 옆에서 근무를 서는 계호원까지 합쳐 6명의 계호원들이 자기네 침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모든 감방 죄인들은 다리를 펴거나 벽에 기대어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됐소?”

나에게 담요를 덮어줬던 창호라는 사람이 물었다.

“올해 19살입니다.”

창호 형은 31살로 나와 같은 이 씨였다. 창호 형과 통성명을 끝내자 옆 감방에서 창호 형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창호야, 새로 온 그 새끼 집이 어디야? 니가 콱 죽여버려라!”
“강철아, 이제 그만해라. 네가 좀 참아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진짜 현실인가? 내가 정말 15평도 안 되는 이 좁은 감방에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영화로만 보던 철창들, 반미터도 안 되는 콘크리트 칸막이 변소, 기름때에 절은 나무 바닥, 3m는 더 되어 보이는 천장.

철창 앞에서 통방하던 창호 형이 내 옆으로 오더니 말을 건넸다.

“저쪽 아이들이 너 욕하는 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내라.”

하지만 나는 창호 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바닥과 벽에 씌여진 희미한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는 내일 나간다! 324일!’
‘나가서 보자! 개새끼들아!’
‘저주받을 이곳에 날벼락이나 떨어져라!’

자유를 구속당하고 여기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절규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써 있었다. 나무 바닥에 바늘로 긁어서 글자를 새겨 놓은 것도 보였다.

12시가 다 돼서야 “이제 몽땅 뻗어 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감방 안의 인원이 12명이었으니 당연히 방금 들어온 내 자리는 나무판자가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나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창호 형이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준하야! 취침시간에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모두가 기상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더니 창호 형은 자기가 깔고 있던 모포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모포를 둘둘 말고 눕긴 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한참을 떨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웬일인지 온몸이 점점 더워지더니 이내 간지럽기 시작했다. 일어나 모포를 걷어 부치고 웃옷을 벗어보니 시커먼 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넌 왜 안 자고 일어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소위 계급을 단 보안원이 뒷짐을 진 채 나를 추궁했다.

“너, 오늘 들어왔던가? 그냥 참고 얼른 자라!”

보안원이 사라지자 나는 손톱으로 이를 잡았다. 도대체 몇 마리가 내 몸에 붙어 있는지 숫자를 헤아리다 보니 100마리가 넘었다. 이잡이를 할 만큼 하고 나서 다시 모포를 둘러쓰고 자리에 누웠더니 이번에는 계호원이 들어와서 “기상!”을 외쳤다.

옆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나도 무릎을 꿇고 뒷짐을 진 채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1호 감방부터 점검이 시작됐다.

“선생님, 1호 감방 청소 및 정돈 끝났습니다. 앉을 준비 할 수 있습니까?”

감방마다 보고 방식은 똑같았다. 그렇게 1호 감방부터 10호 감방까지 보고가 끝나자 자리에 앉으라는 계호원의 지시가 떨어졌다. 구류장의 죄인들은 울방자(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양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는 90도 각도로 숙인 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8시까지 앉아 있으니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계호원이 밥이 담긴 그릇을 쌓아올린 작은 수레를 끌고 감방 앞을 지나가며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면 두 줄로 앉아 있던 죄인들은 그 자리에서 양쪽 벽을 등지고 마주 앉았다.

“선생님, 1호 감방 밥 먹을 준비 끝났습니다!”는 보고가 10호 감방까지 끝나고 나면 계호원이 밥을 퍼주기 시작했다. 창살 앞에 앉은 사람이 우리 방 인원이 12명이라고 보고하자 국그릇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배식구로 그릇들이 들어왔다.

1차로 먼저 밥을 주고 2차로 국을 퍼주는데, 이때 밥을 받던 사람이 재빠르게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밀어서 국을 받아야 한다. 계호원은 담배를 꼬나물고 뒷짐을 진 채 한 손으로 국을 퍼주는데 어떤 그릇은 국을 적게 담고 어떤 그릇은 국이 넘치도록 담아 국을 받는 사람이 손을 데는 경우가 많았다.

내 앞에 차려진 국그릇을 처음 봤을 때는 구역질이 날 뻔했다. 때가 잔뜩 낀 플라스틱 그릇에 새까만 시래기 건더기 한 줄기만 동동 떠 있었다. 내 옆 사람은 그 시래기 건더기조차 없었다.

“먹으라!”

계호원의 구령이 떨어지자 죄인들은 국에 밥을 말아서 훌훌 떠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그 밥과 국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구류장에서는 앉아 있는 그 자체가 고문이고 형벌이다. 규정대로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보면 목과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창살 앞에 서 있는 계호원에게 들통이 났는데, 그러면 계호원들은 움직인 사람을 철창 앞으로 불러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러고는 권총으로 손등을 내리찍었다.

구류장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들은 이 찰나에 눈치껏 목도 돌리고, 허리도 구부렸다 폈다.

나는 구류장에 들어간 첫 주 동안은 하루에 2~3번씩 철창 앞에 불려나가 권총으로 손등을 맞았다. 나에게 제일 악하게 굴었던 계호원들은 리종수, 철민, 성혁, 이 세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긴장을 하고 앉아 있어도 그들의 트집잡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감방 근무를 설 때마다 나는 권총으로 머리와 손등을 맞거나 머리를 땅에 박고 뒷짐을 진 채 1시간 동안 버텨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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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 입술은 파래지고”

어머니는 시금치죽을 먹으면서도 사탕장사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두 달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정말이지 부모 곁을 떠나 보아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뜻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참뜻을 5년간의 감옥살이를 통해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20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나는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면회할 때는 얼굴만 보고 손조차 잡아 볼 수 없었으므로 나는 어머니가 위안 삼을 만한 글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 연필과 종이를 펴놓고 편지 내용에 대해 궁리했다. 좀처럼 어머니에게 힘이 될 만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워서 궁리하던 머릿속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날의 일들이 삼삼히 떠올랐다.

1998년 11월 26일, 친구 광일이의 생일이라 놀다가 오후 1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는 “준하냐?” 하며 반기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누워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머니, 어디 아픕니까?”
“아니……”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러 번을 물어서야 어머니는 겨우 말을 떼었다.

“준하야. 너가 모르게 기철이 삼촌한테 돈 2,000원(당시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은 70~100원)을 꾸어 주었는데, 1년이 다 되도록 갚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그동안 여러 번 받으러 갔는데 매번 꼭 갚겠다고 하기에 양보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면서 엄마를 막 때리려고 하더라. 너무 사정을 하기에 돈을 빌려줬는데, 이제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좋니?”

어머니와 먼 친척뻘 되는 그 사람을 나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생을 술로 살았다. 술에 미쳐서 나중에는 아내와 자식들 몰래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술과 바꿔먹고는 집에 도적이 들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런 삼촌을 나는 평소부터 무시했고, 길에서 만나도 못 본 척했다.

‘자기 집을 망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우리까지 괴롭히려 들다니……’

게다가 어머니를 때리려고 했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나를 말리려다가 “돈을 꼭 받아 오겠다”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당시 조선 돈 2,00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곧 삼촌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촌 아내가 나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준하야,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저 인간이 글쎄, 네 엄마 돈까지 술과 바꿔먹었으니. 나도 이젠 더는 같이 못 살겠다.”
“아줌마가 나에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 다 저 사람이 문제지!”

나는 금방 술이 깬 듯 흰자위가 뻘겋게 충혈된 삼촌을 끌고 대문 밖까지 나왔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내일까지 돈을 갚아달라는 말에 삐딱한 태도로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알다시피 이 삼촌이 돈이 어디 있니?”
“그럼 돈 빌려 갈 때는 갚을 생각도 없이 그냥 가져갔소?”
“임마, 엄마하구 내가 버무린 일인데 왜 네가 끼어들어? 쪼끄만 것이 버릇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담벼락에 머리를 찧고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 일인데 아들인 내가 왜 상관이 없소? 사람 알기를 더럽게 아는구만!”

아줌마가 뛰어와서 더 때리지 말아달라며 말리기에 분을 삭였다.

“무조건 내일까지 갚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소.”
“알았다. 며칠 내로 꼭 갚아주마.”
“언제요?”
“열흘 안에 갚아 줄게. 임마!”

정확히 10일 후에 갚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냥 떼먹자고 드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나 혼자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삼촌이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 갔단다.

보안원(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안원은 나에게 자기와 함께 보안서(경찰서, 한국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기관은 ‘분주소’라 함)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항의도 무시한 채 보안원은 나를 보안서로 데리고 가서는 임시로 대기실이라는 방에 가두어 놓았다.

“삼촌이 살아나면 적당한 처분만 받고, 죽으면 너도 죽어야지 어쩌겠냐?”

대기실 철문을 잠그면서 보안원이 말했다. 나는 삼촌이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에 10일 후에 돈을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던 사람이 무슨 일로 죽는단 말인가? 또 지난번처럼 술을 너무 마셔서 위경련이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갇혀 있노라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문이 열리면서 보안서 부서장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집에 가기 전에 비판서에 손지장만 누르고 가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그렇지. 삼촌이 죽을 일이 있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부서장을 따라 어느 기다란 집에 들어갔다. 보안서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던 나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서장의 사무실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아무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에 들어갔던 부서장이 인차 나오면서 나더러 들어가 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장 찍는 일을 시켰는가 보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여 “옷은 왜요?”라고 했더니 앞에 섰던 보안원이 발길질을 했다.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어디라고 대들면서 지랄이야?”
“비판서에다 지장만 찍고 집으로 가라기에 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때립니까?”
“조용히 해! 여기는 죄인들을 가두는 구류장(유치장)이야. 한번만 더 소리치면 가만 안 둬!”

그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그 계호원(간수)은 내 옷에서 일체의 금속물들을 모조리 뜯어 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이 떨리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다시 옷을 입자 그는 나를 2호 감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야 감방장, 그 새끼 사람 죽인 살인자야. 교양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가 살인자라니 말도 안 돼. 그럼 삼촌이 정말 죽었단 말인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질 않았다. 예심(심문, 사전적 의미는 범죄사실 등을 밝혀내는 소송행위)을 받으면서 나는 삼촌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땅에 넘어지면서 바닥에 박혀 있던 뾰족한 돌에 머리를 찧어 병원에서 4시간 만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회와 반성의 모대김과 함께 5개월간의 예심과정을 거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145조 2항 '과실적 중상의 살인' 죄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삼촌의 사망 감정결과는 ‘차수막 뇌출혈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입술이 파랗게 되고 손등은 꽁꽁 언 채 나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국과 밥을 품 안에 넣어 보온하면서 보안서 철문 앞에서 장시간을 기다렸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면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편지로나마 위안의 글을 드려야겠는데, 쓰려고 펜을 드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새벽녘에 일어나서 쓰리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피곤한 터라 기상총소리와 함께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여 끝내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말았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http://nkd.or.kr/nkd/read.html?s=3001&no=809&page=1, 자료제공: NK데일리
Posted by short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