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평양까지


눈이 왔다. 여느 때는 눈이 오면 마냥 즐겁고 기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교화소에 입소한 날부터 하늘의 해님도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새싹을 틔우는 나무들, 날아드는 산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 초봄의 봄기운에 속아서 일찍이 피었던 버들강아지도 더는 예전처럼 귀엽게 볼 수도 아름답게 들을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면회실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오늘 어머니가 오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눈길을 돌리는 순간,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힘겹게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뒷모습만 보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어머니였다. 내가 있었던 곳에서부터 면회실까지는 100m가량 되는 거리라 사람의 모습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친혈육, 부모자식 간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잘못 보진 않았을까?’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어머니다. 내 어머니다. 나의 전부고 하늘이었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식이 못 알아 볼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 하고 부르려는 순간 기상벨 소리가 났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봄기운에 눈이 다 녹아 없었는데 때 아니게 마지막인가 싶은 눈송이들이 꿈에서와 똑같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꿈이었지만 왜서인지 어머님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꿈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다가 언제 눈 치우기 작업에 착수했는지도 모르게 작업을 하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꿈에서 본 그 장소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하여 면회실 쪽을 보았는데 글쎄 어머님이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면회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게 꿈인가?’ 그러나 설레던 마음은 가뭇 사라지고 어머니의 힘겨운 모습을 보고 나니 가슴이 아팠다.

죄인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뺏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죄를 지은 나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고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면회를 책임진 관리가 준하를 찾는다는 소리에 담당 관리가 가보라고 하였지만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면회 기다림 칸에 들어서자 면회를 책임진 관리가 직접 대면하는 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분명하였으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떠나올 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어머니는 주름이 많고 머리가 허연 할머니였다.

너무도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준하! 네 어머니가 맞아?”

관리의 물음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았으나 분명히 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가 어려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어머니였다.

“준하야, 그새 앓지는 않았니? 어디 다친 데는 없구? 배고프진 않아?”

어머니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눈가에 있는 눈물 자국을 보았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내 어머니가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면회 관리는 5분도 못 되어 면회를 중지시켰다.

“저는 괜찮으니 오늘처럼 수고로이 오는 일이 더는 없도록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때문에 초라해진 어머니의 얼굴이 말이 아니니 앓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조심해서 가십시오.”

말을 끝내고 나는 인차 나와 버렸다.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밥 먹는 칸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정성껏 해가지고 온 음식들이 내 앞에 차려졌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음식을 보는 순간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어머니!’ 갑자기 속으로부터 뜨거운 뭉치가 올라오면서 목이 메어 통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끝내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그 음식을 한술도 뜨지 못하고 앉아서 울다가 30kg이나 되는 속도전가루만 둘러메고 면회실을 나섰다. 그날 나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우울해 있었다.

“준하야~! 니가 여기서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우울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든든히 먹고 건강하게 교화소 생활을 잘하는 거야.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다잡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 어머니를 위하는 거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나한테는 어머니가 있고 이렇게 좋은 말을 해주는 반장도 있는데 왜 이리 맥을 놓고 있는가. 힘내자! 그리고 배우자. 일도 배우고 사람과의 사업도 배우자.

교화소에서는 허약자들이 생기는 것을 고려하여 속도전가루를 받아주었다. 속도전가루란 강냉이로 만든 가루인데 그 가루를 적당한 양의 물에 넣어 반죽하면 그 반죽이 그대로 끈기 있는 강냉이떡이 된다.

그래서 아무 장소에서나 물만 있으면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루라 하여 ‘속도전가루’라고 하였다. 죄인들끼리는 쉽게 펑펑이가루(강냉이에 높은 압력을 주어 부풀리게 한 다음 튀겨낸 과자를 다시 가루로 빻아 만든 것)라고 불렀다.

그리고 면회 온 사람들에게서 가루를 받으면 그것이 얼마든 면식창고(수인가족들이 면회와서 수인에게 넣어준 식량(면식)을 교화소 차원에서 보관하는 창고)에 바쳤다가 하루에 한 번 저녁 먹기 전에 나가서 500g씩 타서 먹었다.

이 운영을 일명 면식소부(수인들이 면회 때 가족들로부터 받은 식량을 관리하는 사람, 수인이 맡아서 한다)라고 하는 죄인이 관리하였는데 그 자리가 아주 좋은 자리였다. 면식을 나오라는 소리를 듣고 나가려는데 반장이 잠깐 보자고 했다.

“준하야, 너두 알다시피 우리 반의 80%가 허약자들이 아니냐. 그래서 말인데 네가 30kg 가루 중에서 5kg을 교화반에 바쳤으면 좋겠다.”
“예, 그렇게 합시다. 다 같이 고생하는데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죠.”

“고맙다 준하야, 어린 것이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와 주니 정말 고맙다.”
“어머니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어 먹기를 바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가서 가루를 퍼내자니 어머니가 굶으면서 힘들게 마련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이윽고 반장과 함께 5kg의 펑펑이가루를 들고 들어오니 교화반 전체에 화색이 돌았다.

70리터의 철통에 물을 넣고 거기에 가루를 따니 멀건 죽이 되었다. 잘 먹겠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좋았다. 58명에게 작은 그릇으로 두 그릇씩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잠시는 주린 창자를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지 우리 죄인들의 생활에서 굶주림은 한시도 떠날 줄을 몰랐다.

식사가 끝나고 곧 학습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앞에 서서 한 구절을 읽으면 따라하는 식으로 학습하였다. 내용은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와 그 외 교화소에서만 출판되는 일명 "새출발"이라는 신문이었다.

따라 읽기를 2시간 반 동안 하고 나면 취침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꼭 사 선생이 잡부조장과 함께 반별로 점검을 하고, 감방 문을 바깥에서 잠근 다음 해제를 알리는 종이 울려야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그러면 감방에는 정적이 깃들고, 곧 코를 고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다들 지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심심히 떠오르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못난 놈 때문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을 고생을 다해서 왔을 어머니의 걸음걸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결심도, 용기도, 정신 상태도 중요하지만 먹을 것으로 고통을 주는 이 감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세끼 강냉이밥, 그것도 짐승 사료를 수입해 들여온다는 싯누런 완두콩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140g 정도의 밥과 절인 양배추 떡잎 한두 오리가 동동 뜬 냄새나는 소금국으로 하루 세끼 먹으면서 일은 황소같이 하자니 몸이 허약에 안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풀이면 풀, 소똥에 박혀 있는 강냉이, 콩 등 먹을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소똥도 구운 건밀빵으로 보인다는 소리가 거짓말이 아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왔지만 나는 매번 가루를 친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돈이 없어 4~5개월 못 오기라도 하면 나도 최악의 배고픔을 겪었는데, 허약병에 걸리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하루 24시간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람은 반정신이 나간다. 나 또한 다른 허약자들과 다를 바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입에 넣었다.

김매기 철에는 온 교화소가 동원되어 모두 김매기를 하는데, 막 자란 파릇파릇한 양배추 잎들을 보안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입에 넣었고, 강냉이모, 고추모, 밥조개, 민들레 등 아무튼 먹어서 독이 없는 식물이란 식물은 한번 툭 털고는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흡사 토끼도 그런 토끼가 어디 있을까 싶다. 뼈만 남은 몸이다 보니 맥이 없어서 두 팔로 호미를 잡고 김을 매야 했고, 입에 문 커다란 밥조개 잎사귀들은 쏘고독~쏘고독~ 손의 도움도 없이 흐물거리는 입술 짬새기로 잘만 기어 들어갔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서 움직일 맥조차 나질 않아 체면도 차리지 않고 면식소부에게로 구걸을 갔다. 전에 어머니가 가져온 기름 한 병을 그가 요구하기에 선뜻 내주었으니 차마 모른다고 못할 거라 생각하고 면식칸 앞에 갔었는데 정작 그를 마주하고 나니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면식자들에게 가루를 500g씩 퍼주면서 나를 반갑지 않게 희뜩거리던 그는 사람들이 다 가고 없자 왜 왔냐고 물었다. 나이 먹은 사람이 내 인상을 보면 알아챘으련만 언제 나한테서 기름을 받은 적이 있냐는 듯이 퍼렇퍼렇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서 “한 번만 도와주오.” 하고 부탁을 했는데 “뭘 도와 달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이런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새끼’라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간신히 참으며 면식창고 열쇠를 채우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면식소부 한 번만…….” 하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확 뿌리치며 “이 새끼 왜 게바라 와서(기어와서) 시끄럽게 해!”라면서 눈을 치뜨고 고아댔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야 이 개새야, 여우새끼처럼 간사하게 기름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재수 없다. 이 새끼야!” 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돌아왔다.

나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마음을 곱게 놀아서는 살아나가기는커녕 남한테 짓밟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승냥이 무리에서 살아 생존하려면 더욱 포악하고 교활한 승냥이가 돼야 하니, 나도 이제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내 눈에는 독기가 항시 사라질 줄 몰랐다.

그래도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나보다 후에 들어오는 나이 많은 신입자들에게는 존댓말을 써주었더니 나중에는 나를 부려 먹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정이 가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과 500g 되는 펑펑이 가루도 조금씩 같이 나누어 먹곤 했는데 자기네한테 면회가 오면 나를 개 닭 보듯 쳐다보지도 않으니 참말이지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존댓말을 써주던 나이 먹은 신입자들에게 반말을 하고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개새끼’ 소리도 입에 달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반장까지도 하룻밤 사이에 180도로 바뀐 내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교화소에 들어가서 제일 힘들던 시기에 다행히도 어머니가 또다시 면회를 왔다. 너무 반가워서 어머니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고, 철없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지금 허약병에 걸리기 직전입니다. 조금 바쁘더라도 세 번만 한 달에 한 번씩 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죽을힘을 다하여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웃는 얼굴로 ‘어머니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라는 말도 없이 찔찔 울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와달라고 했으니 나 같은 후레자식이 또 있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는 내 몰골을 보고 “응! 준하야, 엄마가 어떻게 하든 한 달에 한 번씩은 면회 오마!” 하고는 빨리 들어가서 음식부터 먹으라며 손짓으로 자꾸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는 너무 배가 고팠던 때라 ‘어머니 조심해서 가십시오.’라는 말도 못하고 정신없이 음식을 채 씻지도 않고 입에 걷어 넣었다. 1kg의 밥, 1kg의 찰떡, 돼지고깃국, 김치 한 포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히 먹어치우고 나서야 어머니가 갈 때 잡술 밥은 있는지, 차비는 넉넉한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 인사말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송구스러워 마지막 떡 조각을 씹다 말고 입에 문 채 훌쩍거렸다.

힘들게 죽을 잡수면서도 자식에게 떡과 밥, 따끈한 돼지고깃국을 해온 어머니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심지어 한 달에 한 번씩 와달라니 이게 어디 자식으로서 할 소린가? 그때 얼마나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송구스럽던지 지금도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Posted by short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