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평양까지


구류장에 들어간 지 8일째 되던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오전 11시경 계호 책임자가 감방에 들어왔다.

“준하! 너의 어머니가 이 추운데 너에게 밥 먹이겠다고 정문 앞에서 보안서장 자동차를 가로막아 난리가 났다! 너희 어머니 같은 사람 흔치 않아! 어머니 잘 만난 줄 알고 생활 잘해!”

계호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네 엄마 배가 불룩해서 뭔가 했더니 밥이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있더라!”

나는 계호원을 따라 면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파랗게 얼어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준하야, 배고프지? 아픈 데는 없니? 춥지? 옷 가져 왔으니 우선 옷부터 입어라!”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오.”

어머니가 가져온 옷을 입고 나니 추위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면회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어머니, 빨리 나가오. 조금 있으면 정치부장(정치사상사업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직책)이 온다니까 그 전에 빨리 나가시오!”

담당 계호원의 성화에 나와 어머니는 몇 마디 말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보안서장에게 부탁하여 밥을 넣어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받아먹지 못했다. 계호원들이 중간에 농간질을 하여 계호원들의 잡일을 도맡았던 죄인 떡봉이에게 그 밥을 모두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면회한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어머니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꾀를 냈다. 나는 형을 선고 받고 교화소에 가기 전에 어머니와 단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맹장이 터진 것처럼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오후 4시부터 오른쪽 아랫배를 쥐고 뒹굴었다.

그때가 리종수 계호원의 근무시간이었는데, 그는 내가 아파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며 아예 대기실에 앉아 철문까지 닫아버리고 상부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배를 쥐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의 다른 죄수들도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윽, 어후~ 아!”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뒹굴어도 리종수 계호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의 근무가 끝나고 성혁이라는 22살짜리 어린 계호원이 근무에 들어왔다.

“이거 어느 새끼가 고아대? 주댕이를 콱 문질러 버리고 말까보다. 어느 새끼야?”

계호원 성혁이는 악을 쓰며 뒹굴고 있는 나를 보자 대뜸 난로 옆에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더니 “야, 창호! 그 새끼 이쪽으로 끌고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끌어 철창 밑 배식구 앞에다 눕혀 놓자 그는 철창 사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 이 아픔을 참아야만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몽둥이질을 하건 말건 배를 움켜쥐고 계속 뒹굴었다.

계호원 성혁이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인자 새끼, 콱 썩어져라!”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저녁 10시경 계호원 영호가 근무를 교대하면서 내 비명소리를 듣고 전화로 계호 책임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계호 책임자는 감방에 도착하자 조용히 창호 형을 불러서 내가 꾀병인지 아닌지 묻더니 창호 형과 다른 죄인 한 명에게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내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고, 창호 형의 등에 업혀 나는 군(郡)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중학생 시절 친구 영춘이가 학교 수업 중에 맹장이 터져서 그를 업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영춘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질문과 진찰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의 기억 때문에 의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내 배를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에게 통증이 시작된 시간을 묻더니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피검사를 못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덜컥 겁이 나 있었다. 계호원의 몽둥이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꾹 참고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후회가 몰려왔다.

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계호원과 창호 형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의사 단둘이 수술실에 남게 됐다.

“너 꾀병이지? 솔직히 너 아픈 기색이 안 보인다.”
“예? 어째 병원에 오니까 아프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떠보기 위한 의사의 질문에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아프지 않으니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의사는 오히려 긴장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맹장이 터져 버려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의사는 곧장 긴급수술을 결정했다. 오히려 맹장이 터진 환자를 이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을 책망했다.

나에게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했던 계호원 성혁이는 “준하야, 너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 수술 잘 받고 와라!”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홀딱 벗고 수술실로 들어가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술대에 눕자마자 의사가 내 두 팔을 수술대에 묶더니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다 보니 그 고통이 엄청났다. 칼을 대는 배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속이 메스껍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뱃속을 살피던 의사는 내 얼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들더니 “너 정말 배가 아프긴 아팠니?”라고 물어왔다.

“선생님, 사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로 아프다고 했습니다. 달아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 그냥 어머니와 며칠간 병원에 있다가 교화소에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의사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계호원을 속이고 내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승인해줬다. 가른 배를 꿰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리가 뒤틀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봉합이 끝나고 나서 나는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고통을 참느라 팔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팔이 굳어서 구부려지지 않았고 몸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의사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서 옷을 챙겨 입고 204호 병실로 움직였다. 수술실 바닥에 흘려진 피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핑핑 돌고 연신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 2층 병실까지 갔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아침 7시가 돼서야 멎었다.

나는 의사의 배려로 일주일 뒤에 뽑아야 할 실을 10일 뒤에 뽑았다. 실을 뽑고 구류장으로 돌아가던 날, 보안서 정문 앞으로 배웅 나온 친구와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자료제공: NK데일리
Posted by short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