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평양까지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교화소에서 생각 없이 지내는 사람은 둔해지기 마련이고 항상 남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문득 지금 내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이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반장들의 대부분이 사회에서 돈이 많거나 직위가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입소 첫날부터 별 고생을 하지 않다가 쉽게 반장자리에 오르게 되어 나 같은 일반 죄인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반장 한 사람이 작업반 하나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옆에서 두세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반원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반장 아래 있는 우두머리를 흔히 ‘티(조장)’라고 부른다.

사실 반장은 담당 간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며, 이 티들의 활약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이가 48살인 우리 벌목반장은 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티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내가 스스로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벌목반은 바른 말을 하고 일을 잘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소를 해서, 나와 한두 달 차이로 교화소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티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다툼을 벌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것처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다툼질 하면서 싸우다보니 후에 들어온 신입자들 또한 서로 물어뜯고 하면서 화목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나 혼자서 얼마든지 쉽게 생활할 수 있었다. 노동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며, 나를 믿고 정을 주고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티가 되면 작업반을 잘 운영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욕도 하게 되고 미움도 받을 수 있었으며, 전에 사이가 좋던 사람들과도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티로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굶주림에서 시달리는 죄인들의 눈에는 항상 살기가 번뜩거렸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도 서로 주먹질을 하고 주먹질을 할 힘이 없는 사람들도 앉은 자리에서 서로 침을 뱉으며 다툴 정도로 무질서했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교화소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티로 올라설 수 있는 명분을 마련했다. 재정과장이 우리 담당 보안원에게 자기 집 하수로 파는 일에 죄인을 보내달라고 하자 담당 보안원은 나에게 일 잘하는 사람 3명을 데리고 가서 처리해 주고 오라고 시켰다.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 3명과 함께 재정과장의 집으로 갔다. 재정과장은 나에게 “아이들이 도주하지 않는가 잘 보라.”고 하고는 들락날락하면서 우리를 감시했다.

작업 도중 세 사람은 나를 믿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마당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들을 주어 넣었다. 하지만 나는 담배꽁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을 도와주면서 재정과장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담배는 죄인들에게 있어서 곧 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은 담배 3개와 밥 한 덩이를 바꾸어 먹을 수 있었고, 대개 배가 부른 반장이나 취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고 남은 밥을 담배와 바꾸어 주었으니 죄인들에게 있어서 담배보다 더 좋은 화폐는 없었다.

그런 좋은 담배꽁초가 재정과장 집 마당에 그득 널려 있는데도 줍지 않고 있는 나를 다른 죄인들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기회를 엿보다가 재정과장이 집 안으로 들어간 틈에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대개 간부들은 적지 않은 담배농사로 자기들이 피울 담배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늦가을까지 새끼줄에 묶어 말리던 담배를 그대로 마대에 넣어 창고에 두곤 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뻘게지면서도 표가 나지 않도록 담배를 솎아서 겨드랑이와 배에 숨겨 넣고는 얼른 나왔다.

죄인 3명은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창고에 들어가자 간이 콩알만 해져 있다가 내가 무사히 나오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짓을 하며 가지고 나온 담배를 다른 죄인에게 넘겨주고는 또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재정과장이 당장에라도 마당으로 나올까 봐 담배를 조금밖에는 못가지고 나왔는데 금방 나올 것 같았던 재정과장은 아예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시 창고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뱃심 좋게 여유를 가지고 몸에 감출 수 있을 만큼 넣고 나왔다. 나로서는 아주 통쾌한 성공이었다.

“난 조장이 창고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소.”
“글쎄 말이오. 아까 조장이 두 번째 들어가서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 때는 당장 재정과장이 뛰어 나올 것 같아 어찌나 속이 조마조마 하던지!”

일을 끝내고 교화소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흥분 섞인 수다를 떨었다. 교화소 휴게실에 도착하여 담배를 모아 보니 거의 200g 정도가 됐다. 나는 그들에게 믿는다는 의미로 눈을 끔벅끔벅 해보이고는 휴게실 화구간 밑에 담배를 파묻었다. 저녁에 입방할 때 나는 담배 한 뭉치를 배에 숨기고 취사장으로 갔다.

량명학과 나는 신입반 시절 옆자리에 앉았던지라 지나칠 때마다 눈인사하던 사이였다. 내가 취사장에 가자 그는 반가운 기색을 지으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소. 사실 감기에 걸렸는데 감기약이 있으면 좀 주오.”

죄인들은 담배를 ‘감기약’이라고 부른다.

“준하, 감기약을 찾다니 이제 살 만한 모양이지? 나도 약이 없어서 속이 타네.”

나는 배 속에 숨겨 놓은 담배를 그에게 몰래 쥐어주며 눈을 찡긋하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시간에 내 앞으로 밥 세 덩이가 들어왔다. 반장은 감방에서 밥 먹을 때 배식함(그릇을 담아두는 나무함)을 엎어놓고 식탁처럼 그 위에 밥과 국을 놓고 혼자 앉아 먹는다.

작업반마다 모두 똑같았는데, 며칠 전부터 나는 반장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네 줄로 앉아있던 반원들은 두 줄씩 마주앉아서 손에 손을 거쳐 밥을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전달해 주는데, 이때 자기 손을 거쳐 가는 밥덩이와 국을 보면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여기에 취사장 배식공이 내 앞으로 세 덩이의 밥을 넣어주자 모두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준하야, 이게 무슨 밥이냐?”

여느 때는 술렁이던 반원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까 량명학에게 가서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던데 생각지 않게 세 덩이나 주네? 반장 이 밥을 제일 허약한 사람한테 주기요!”
“응. 야! 현철이, 용수, 광호에게 하나씩 주라!”

배식공이 그들에게 밥을 주자 세 명은 밥을 받아들고 기뻐서 잘 먹겠다며 좋아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는 밥덩이를 힐끔거리면서 인상을 구겼다.

반장은 반장대로 배가 고팠지만 허약자들에게 밥을 주는 나를 대견해 하였고, 나 역시 배가 고팠지만 흐뭇한 심정에 우쭐해졌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날 믿고 밥을 넣어준 량명학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교화소 내에서는 고향 사람이라 외면할 수 없어 밥을 한 덩이 더 주었다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고자질을 하여 취사장에서 다른 작업반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정황에서 나를 믿고 밥을 넣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그 밥 세 덩이를 반장과 내가 먹었더라면 담당 보안원이나 교화과 선생의 귀에 들어갔겠지만 허약자들을 먹였던 통에 별일 없이 끝났다. 내가 위험을 무릎 쓰고 재정과장 집에서 담배를 훔쳐서 허약자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나니 감방의 죄인들은 나를 진짜 티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해 벌목반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 먹이다 보니 모두가 나를 좋다고 지지하게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티가 되어버렸다. 일할 때도 옥신각신 다투던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자신들의 의견을 접고 군소리 없이 따라주었으며, 너나없이 내가 삽질하면 삽을 뺏어들며 도끼질하면 도끼를 뺏어들며 나를 도와주었다.

그들이 나를 존경해주고 지지해주니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있는 지혜를 다 짜내어 그들에게 국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자기 집 앞에서만 짖는 똥개’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다른 작업반 사람들과도 친숙해져야 했다. 각 반에서 티로 통하는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접촉하고 개인의 성격 상태, 수준 정도를 파악하여 상대하자니 첫 시작이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담배였다. 남자들끼리의 자존심도 만만치가 않았으므로 나름대로 인간수업을 해가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쟁취해 나갔다. ‘인간수업’은 말로는 네 글자이지만, 헤쳐 보면 쉽지 않은 미묘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 다종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연구하고, 또 그 결론에 따라 남자다운 자존심을 지켜가면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오직 먹을 생각만 하는 반원들과는 달리 나는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짐을 스스로 걸머쥐고, 배가 고파도 웃어야 했으며 힘들고 지쳐 잠을 자고 싶을 때도 머리를 굴려 지혜를 짜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잡부조장 리철, 면식소부 김서일, 낙후자반의 마일, 목공반장 김혁철, 목공반 조장 최광혁, 차수리반장 장송식 등 좋은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죄인들 속에서 인정받는 티가 되었다.

이 중에서 구내반장 김영수와 취사조장 량명학은 나의 첫째가는 손님이었다. 우리 벌목반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절대 입 밖에 내뱉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휴식날 마음 놓고 나에게 놀러와 감방 변소에서 담배를 피우고는 돌아갔다.

또한 우리 반에는 손바느질이 우수한 김재관, 쌍소리와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웃기는 곽만호 등이 있어서 다른 작업반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김재관이 만든 장갑은 공장제품이 울고 갈 정도로 맵시가 있어, 반장들은 물론 보안원들까지도 수없이 나에게 부탁했고, 곽만호의 재치 넘치는 입담 덕분에 휴식일 때마다 다른 반장들은 우리 반에 모여 웃고 떠들었다.

죄인들의 질서를 통제하는 잡부조장마저도 우리 벌목반은 건들지 않았고, 오히려 사 선생의 검열을 사전에 귀띔해 주었으므로 우리 반은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반 티들과도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어느새 반 년 남짓한 기간에 2과, 5과, 4과의 취사장, 티들과도 관계되어 나는 교화소 내에서 최고의 사람부자가 되었다.

나는 구내반장 김영수, 취사조장 량명학과 사업하여 얻은 강냉이가루로 1주일에 한 번씩 우리 벌목반 사람들을 강냉이죽으로 배불리 먹였고, 공무반장의 도움으로 낡은 도끼와 하산바를 모두 새 것으로 바꾸었다.

도끼가 좋아지니 일하기도 한결 쉬웠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강냉이죽이라도 배불리 먹으니 벌목반 죄인들의 얼굴은 다른 죄인들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몇 사람의 허약병을 돌보다 보면 다른 사람이 허약병에 걸리는 판이니 언제나 허약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Posted by shortwave